1910년대까지 별달리 우리민족을 지칭하는 말은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민족을 '조선민족'이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1일자에 게재됐다. 환손(桓孫)이라는 필명으로 게재된 기사의 일부다.
"우리 대황조(大皇祖) 단군께서 태백산에 강림하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셨으며, 우리민족을 조선사람이라 하셨으니 이 조선이라 하는 두 글자는 족히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의 전부를 대표할 만하고… 단군조선은 우리민족의 발달한 기초를 처음 시작하였으며 우리민족의 전성하던 시대의 이름인즉 영광의 표도 될지라. 그런고로 나는 우리민족의 종족 이름을 조선민족이라 하는 것이 가하다 하노라!"
'대황조'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 글의 작성자는 대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황조'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대종교가 중광(重光)되며 발표한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용어로 '조선민족'보다 '배달'(倍達)이라는 용어가 점차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배달'이라는 용어도 대종교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이 시기 많은 지식인들은 대종교를 받아들였다. '국망'(國亡)의 충격을 사상적·종교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고, 대종교를 통해 국권회복을 꾀하려 한 것이다. 이들에 의해 '배달'이라는 용어는 점차 확산됐다.
1904년 음력 10월 3일자 대종교의 '단군교포명서' 문건에 '배달'의 어원에 대해 처음 기록돼 있다.
"오늘의 말로 조선국(朝鮮國)이라 칭함은 단군조(檀君朝) 중엽에 배달국(倍達國)이라 칭한 말이 한자(漢字)의 뜻과 음에 의해 변하여 조선(朝鮮)이 되었으니, 고어(古語)에 할아버지를 배(倍)라 하고 아버지를 비(比)라 하며 빛나는 물체를 달(達)이라 하니, 조상의 광채(光彩)를 받은 사방의 땅이라 하여 국호(國號)로 정한 것인즉 배달(倍達)은 즉 조광(祖光)이다. 한(漢) 지역 사관(史官)의 문체(文體)가 외국의 국명(國名)에 나쁜 글자를 쓰는 관례를 따르는데 하물며 조(祖) 자(字)를 사용하겠는가? 조(祖)는 그 음(音)에 의해 바꾸어 조(朝) 자가 되고 광휘(光輝)를 그 뜻으로 바꾸어 선(鮮) 자가 되었으나…"(倧敎總本司 編, 『大倧敎重光六十年史』, 大倧敎總本司, 1971.)
'단군교포명서'에서는 배달의 뜻을 "조상의 광채를 받은 사방의 땅"으로 해석했고, 단군조 중엽에 국호로 삼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배달이란 용어를 고대 중국의 사관들이 외국의 국명에 대해 나쁜 글자를 사용하는 관례에 따르다보니 결국 조선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1909년 음력 10월 3일에 발표된 대종교 문건인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檀君敎五大宗旨佈明書)에서는 대황조가 서기전 2333년에 나라를 세운지 740년 뒤인 서기전 1594년에 배달국을 세웠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라를 여신지 740년 뒤(丁亥 殷太戊44년 西曆紀元前1594년)에 배달검신(倍達儉神)께서 다스리실 때 수사노(秀斯老) 철인(哲人)의 교화에 의해 삼천단부(三千團部)에서 태초의 풍속이 지켜지는 시절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대황조께서 삼천단부의 영역을 합쳐서 이름하여 '배달'이라 하였다. 당시 검신(儉神)은 또한 배달 성호(聖號)를 칭하였다. 이때는 단군조(檀君朝) 중엽으로 가장 번성한 시대였다. 그 후 수사노 철인의 제자들 중 학식과 품행이 특히 우수한 자들이 삼천단부의 각 수장이 되었는데, 그 수가 반이 넘었다. 이리하여 본교(本敎)의 융성과 번창은 오래갔다.사람들이 마음을 느껴 깨닫는 바는 깊고 오래갔으며, 배달 강역 안의 삼천단부는 생활이 즐겁고 화평하였으며 어질고 덕이 있어 오래 사는 지역이었다."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에서는 삼천단부의 영역 모두를 합친 지역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의 배달이 설명되어 있다. 단군조(檀君朝) 중엽인 이 배달의 시기가 우리민족 역사에서 가장 번성한 시대였다고 한다. 여기서의 삼천단부에 대해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는 "우리 대황조성신(大皇祖聖神)께서 이 때(戊辰 唐堯25년 西曆紀元前2333년) 강림하셨다.…구역 내에 삼천단부를 두셨으니. 옛 말에 환인(桓因) 신시씨(神市氏)의 무리 3000을 말함은 이를 전하여 이르는 것이다."
이 삼천단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桓因 ; 帝釋을 말함)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白山)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千夫人))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곧 太白山은 지금의 妙香山)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三國遺事』卷 第1 「紀異」第1 “古記云, 昔有桓(謂帝釋也). 庻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徃理之.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삼국유사'의 '무리 3000'이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의 삼천단부가 된 것이고, 그 삼천단부의 지역에 배달(국)이 세워진 것이다. 배달족은 그 배달국의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다. '단군교포명서'에서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를 거치며 정립(定立)된 배달이란 개념은 '삼국유사'에서 환웅의 신시(神市) 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무리 3000 즉 삼천단부를 통합하여 단군조(檀君朝)에서 가장 번성한 시대를 만들었을 때의 국명(國名)인 것이다.
삼천단부가 합쳐져 강역은 넓었고, 환웅이 건설했던 신시(神市)의 옛 풍속이 지켜졌고, 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자들이 각지의 수장이 되었기에 다스림은 시비(是非)를 올바로 가려 공정(公正)했으며, 고유의 신앙은 융성했고, 이에 따라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깨달음은 깊어졌으며, 그러므로 배달 강역안의 모든 사람들은 생활이 즐거우며 화평하였고, 또한 자연스레 그 사람들은 어질고 덕이 있게 됨으로써 오래 사는 지역이 바로 배달(국)이었던 것이다. 즉 배달이란 우리민족 역사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이상국(理想國)으로 설정된 것이다.
배달이란 용어는 대종교의 문건인 '단군교포명서'에서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를 거치며 정립된 말이다. 이 용어는 1910년대 초부터 우리민족 사이에 널리 퍼졌다. 대종교에서 출발한 용어지만, 1910년대 말 이후에는 우리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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