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대종교-불교' 회통한 종교인
큰법당 기둥에 써붙인 주련(柱聯)도 한자가 아니라 한글이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물을 모두 마시고 /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하고'.
1970년 봉선사 주지였던 운허(耘虛. 1892~1980)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한자 대신 한글로 편액을 걸었다. 우리나라 사찰 법당 가운데 최초의 한글 편액이다. 당시로선 파격이다.
'큰법당' 글씨체는 단정하고 원만하다. 큰법당 편액은 서예가 금인석씨의 글씨다. 큰법당 주련의 글씨는 석주(昔珠) 스님의 것이다. 큰법당 뒤편 조사전(祖師殿)에도 한글 주련이 붙어있다. '이 절을 처음 지어/ 기울면 바로잡고/ 불타서 다시 지은/ 고마우신 그 공덕'이다. 그 내용 또한 소박하고 진솔하다.
운허 스님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의 추격에 몸을 피하기 위해 1921년 '박용하'라는 가명으로 불교에 귀의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원래 이름은 '이학수'였지만 항일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이시열'로 바꿨다. 광복 이후인 1962년 '이운허'로 개명했다.
그래서 '이운허'보다 '이시열'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독립운동 기록에는 더 많이 등장한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운허 스님은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하는 동시에 비밀결사대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 이때 호를 '단총' 이름을 '이시열'로 바꿨다.
'이시열'은 '광한단' 단장으로 1920년 12월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흥사단'에 가입한 후 국내 각 단체들과 연락목적으로 국내 잠입했다가 일제에 발각되면서 추격을 피해 금강산으로 가던 중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소재 봉일사로 피신했다. 이때 '박용하'라는 이름으로 은천선사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광복 후에도 '이시열'은 대종교 총본사로부터 1946년 2월 23일자로 '지교', 두달 뒤인 4월 24일자로 '상교'의 교질을 제수받았다. 통상 지교에서 상교까지는 5년이 걸리는데 이시열의 대종교단 내에서의 위치와 교리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시열은 비록 불교에 귀의했지만 과거 동창학교 시절 '단애 윤세복' 종사와의 인연으로 대종교단과 아주 긴밀한 인연을 이어갔다. 불교인으로서 대종교의 교질을 받았다는 점은 홍암 나철 대종사의 유훈인 종교다원주의를 실천한 인물로서 큰 의미가 있다.
대종교와 인연이 깊었던 불교인으로 '한용운'과 '김법린'을 들 수 있다. '한용운'은 나철 대종사의 유고집을 간행하려다가 미완에 그쳤을 정도로 대종교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김법린'은 대종교 청년이었던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의 영향을 받고 훗날 조선어학회에도 참여했다.
봉선사에는 운허 스님과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도 깃들어 있다. 운허 스님과 춘원은 6촌간이다. 이광수가 친일 변절자의 오명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광복 직후, 운허 스님은 잠시 봉선사에 묵을 곳을 마련해줬다. 그리고 법화경을 통해 이광수를 불교의 세계로 이끌어줬다. 이광수는 6‧25전쟁 때 납북됐지만 이런 인연으로 1975년 봉선사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운허스님이 본래 대종교인이었고 대종교의 한글학자인 이극로, 최현배, 이병기등과 깊은 교류를 했다. 운허스님의 불경의 한글번역과 봉선사의 한글 현판도 이와 무관치 않다. 법정 스님은 1960년대 운허 스님과 함께 불경을 번역하며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종교인 이시열이자 불교의 운허 스님. 그는 팔만대장경과 수많은 불경을 한글로 번역해 불자들이 불경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한 큰스님이었다. 또 1910년~1930년대 서간도 지역에서 민족교육과 독립투쟁에 일조한 독립운동가이자 '유교-대종교-불교'를 회통한 종교인으로, 후대에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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