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독약이 되는 말...힘이 되는 말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7-03 08:00:02
  • -
  • +
  • 인쇄
말은 생명력과 파괴력 동시에 지니고 있어
함께가는 길, 서로 응원할 때 완주할 수 있어

한 아이가 우물가에서 물 긷는 여성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저 애는 참 못생겼다. 얼굴은 홀쭉하고 눈은 왜 저렇게 움푹할까?" 그날부터 아이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아이는 명석해서 스물네 살에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6년이 되도록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못했다. 어느 날 미국 여성 헤리엇 페이 핀치백(Harriett Faye Pinchbec)이 던진 말 한 마디에 힘을 얻었다. "당신처럼 잘 생긴 동양학생은 처음입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 곧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한신대 문동환 교수다.

말에는 힘이 있다. 독약이 되기도 생약이 되기도 한다. 한 마디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펑펑 울게 만들 수도 있다. 반대로 얼굴을 환하게 만들고 기운을 주어 벌떡 일어서게 할 수도 있다.

◇ 증오에서 관용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크게 논란이 되는 것은 대개 '말' 때문이다. 알다시피 권력자와 정치인들은 극단적 언어로 적대성을 키워 적을 만들고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속보이는 수법을 구사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범죄학자인 타르드(Jean-Gabriel de Tarde)가 지적했듯이 증오의 힘은 강력하다. "공중의 감격, 호의, 관대함을 일으키는 것은 오래가지 않으며 또 그들을 움직이지 못한다. 반대로, 공중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야말로 …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서 특히 정치인들이 대중의 증오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의 공격성이 터지도록 자극해 자신의 군대로 삼으려는 것일 게다.

물론 정치는 언어의 게임이다. 하지만 정치 기획은 상식적이어야 한다. 더구나 사회의 통합과 상생을 위해 앞장서야 할 정부가 정치적 선동의 선봉에 서고, 합리적 토론을 하여 대안을 마련해야 할 정당들이 소모적인 정쟁을 하며 국민들을 이간시킨다면 이는 여간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언론 역시 언어적 활동이다. 그들에겐 펜으로 진실을 밝히고 공론 마당을 건강하게 이끌어 갈 파레지아스트의 윤리가 있다. 그런데 앞서서 대결을 부추기는 기사를 남발하고 증오를 확산시키는 매체를 자처하는 건 왜일까. 자기 이익이나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마치 극단적 언어가 춤을 추는 지옥이 된 것처럼 느끼는 것은 과민함 때문일까.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이런 연설이 등장한다.

"세상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고 풍요로운 대지는 모두를 위한 양식을 줍니다. 인생은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방법을 잃게 되었습니다.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중독시키고 세계를 증오(hate)의 장벽으로 가로막았는가 하면 우리에게 불행과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했지만 우리 자신들은 그것에 갇혀버렸습니다.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계는 우리에게 더한 갈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지식은 우리를 냉정하고 냉소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은 너무 많이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거의 느끼는 게 없습니다.

기계보다는 인간성(humanity)이 더욱 필요하고 지식보다는 친절과 관용(kindness and gentleness)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비참해지고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1940년 작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의 한 대목이다. 이 연설은 마치 친절과 관용을 내던지고 마구 증오의 화살을 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집단을 겨냥하는 듯하다. 덩달아 혐오에 감염돼 분노하는 우리의 무리성에 경고를 내던지는 것 같다.

◇ 미성숙한 언어에서 성숙한 언어로

M. 스콧 펙의 <끝나지 않은 길>에는 심원하면서도 독자에게 힘을 주는 메시지가 많다. 부제가 '고통에서 자기 완성으로'다. 그는 "미성숙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둘러 앉아 인생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성숙한 사람의 특징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책임성responsibility, 둘째는 균형balance, 셋째는 즐거움의 유보delay of entertainment, 넷째는 헌신dedication이다.

사실 "끝나지 않은 길’이라는 번역은 그리 정교하지 않다. 'roadless'는 '길 없는 길',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endless와는 큰 차이가 있다. 난 스콧 펙이 말하는 '성숙의 지표'는 그/그녀가 사용하는 언어와 밀접하다고 상상해 보았다. 말의 책임성, 균형있는 언어 감각과 사용, 배설하고 즐기는 언어를 넘어선 절제, 타자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랑의 언어가 성숙한 말이 아닐까. 남 탓 하는 말, 책임지지 않는 말, 극단성과 혐오가 담긴 언어, 충동적인이고 자극성을 가득한 수사, 상식이나 인간에 대한 기본적 배려를 무시하는 공격 언어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는 적잖이 미성숙한 상태가 아닐까.

이지선 교수의 마라톤 도전기를 읽으며 마음이 훈훈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20대 때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고 40여 차례의 피부이식 수술을 한 탓에 몸을 움직이는 게 원활하지 않다. 홍보대사로 함께하는 푸르메재단에서 마라톤에 한 번 참가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2005년 뉴욕에서 열리는 뉴욕국제마라톤대회에 장애인 마라토너들과 참가하게 됐다. 재단 관계자들은 10km 정도만 같이 뛰어주길 요청했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연습차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니 자신의 한계는 딱 8km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4만명의 마라토너가 참가했고 뉴욕 시민들이 길가에 나와 응원했다. 그녀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최고 기록 8km의 거의 3배를 지나왔다. 하지만 왼쪽 다리는 빠질 것처럼 아팠고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아…' 하는 비명소리가 절로 나왔다. 옷에 붙은 태극기를 보고 "Go, Korea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서 애국심으로 또 몇 발자국을 떼는 식으로 걷기도 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고 길가의 울타리는 다 치워졌고, 응원하는 사람도 없고 중간중간 경찰만 서 있었다.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고 한다. 온 몸의 세포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가 있었다.

"이지선 화이팅!!!"

센트럴 파크 입구에서 한 한국여성이 노란 피켓을 들고 외쳤다. 그 응원을 듣고 멈출 순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 응원의 힘 덕분에 끝까지 걸었다. 7시간22분26초의 기록으로 42.195km를 완주했다.

우리의 인생 마라톤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마디 격려의 말을 건네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계속 달릴 수 있지 않을까. 서로 응원하면서 함께 가야할 길, 아직 가보지 않은 그 길은 따스한 대화와 소통의 힘으로 완주하게 되지 않을까.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농심 조용철 부사장,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

농심은 조용철(63) 영업부문장 부사장을 12월 1일부로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내정했다고 21일 밝혔다.신임 조용철 사장은 내년 3월 열리는 정기주주총

KT, 악성코드 감염 알고도 '미보고'…"심각성 인지 못했다"

KT가 지난해 개인정보가 포함된 악성코드 'BPF도어'에 감염된 사실을 인지하고도 당국은 물론 대표이사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채 내부에서 은폐한 사실

삼성전자, 전영현·노태문 '투톱' 체제…쇄신보다 '안정'에 방점

삼성전자 조직이 전영현 부회장과 노태문 사장 '두톱' 체제로 강화된다.21일 삼성전자는 반도체(DS) 사업의 전영현 부회장을 유임하고, 모바일(MX)·

대한항공, 삼성E&A와 손잡고 美SAF 시장에 진출한다

대한항공이 삼성E&A와 손잡고 미국발(發) 지속가능항공유(SAF:Sustainable Aviation Fuel) 시장에 진출한다.대한항공과 삼성E&A는 이를 위해 지난 20일 오후

[ESG;스코어] 스코프2에서 멈춘 금융사들…공시품질 '신한 1위·KB 2위'

신한금융이 국내 금융사 기후공시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고, 한국투자공사(KIC)는 최하위로 나타났다.20일 뉴스트리는 신한·KB·하나·우리

수퍼빈·아로마티카·커뮤니코, 순환경제 모델 구축 '맞손'

AI 기후테크 기업 수퍼빈과 아로마테라피 기반 스칼프&스킨케어 브랜드 아로마티카, 교육혁신 비영리단체 커뮤니코가 '지속가능한 자원순환체계 구

기후/환경

+

전쟁 복구에 탄소시장 도입?…우크라 재건에 기후금융 활용 논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재건 과정에 탄소시장과 기후금융을 결합하는 새로운 모델이 논의되고 있다.20일(현지시간)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Atlant

인제군 산불 17시간만에 꺼졌다...산림 36ha '잿더미'

강원 인제군 기린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17시간만에 진화됐다.21일 산림당국에 따르면 이날 동이 트자마자 소방헬기 29대를 동원해 진화작업을 한 결과

亞 탄소시장, 글로벌 자본이 주목하는 새 투자 무대로 급부상

아시아 탄소시장이 국가별 규칙이 제각각인 초기단계에서 벗어나 국제자본을 끌어들이는 새로운 투자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20일(현지시간) 기후

"해양 CCUS는 검증안된 기술...성능·영향 모니터링해야"

해양 탄소포집·저장(CCUS) 기술은 적절한 모니터링과 검증없이 성급히 도입하기에는 위험성이 크다는 경고가 나왔다.20일(현지시간) 유럽 해양위원

2100년 美 5500개 유독시설 해안 침수로 위기 직면

2100년에 이르면 미국의 5500개 유독시설들이 해안 침수로 위기에 놓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의 유독성 폐기물 저장소나 석유·가스 저장시설, 오

먹이로 착각하고 '꿀꺽'...바닷새·거북, 소량의 플라스틱에도 폐사

생각보다 적은 양의 플라스틱만으로도 다양한 해양생물이 죽을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미국 해양보호단체 '오션 컨저번시'(Ocean Conservancy) 연구팀은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