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우리 사이 '철조망' 걷어내는 법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5-20 11: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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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대결의 극단화 현상, 이제 낯설지 않아
우리 스스로 일상에서 평화 위한 자세 필요해

중세시대 어느 수도원에 낯선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와 기웃거리고 있었다. 수도원을 지키는 사람이 나가서 물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나그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에 담겨있는 이야기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과 갈망이 무엇일까? 평화로운 삶, 끝없는 사랑, 몸과 마음의 풍요일 것이다. 재앙처럼 닥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우리는 평화로운 삶과 일상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그 여파가 지구촌 전체에 미치면서 평화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아마 참혹한 전쟁이 없는 평화야말로 인류의 가장 강렬한 열망일 것이다. 분단이라는 물리적 정신적 대결 구도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보다 절실한 염원이자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갈망할 뿐 아니라 찾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평화를 이룰지 알지 못한다. 평화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깨어진다. 전쟁과 대결로 이익을 취하는 세력들이 항상 득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각자는 평화를 만드는 일에는 한없이 무력한 것 같다. 그래도 할 일은 있다. 지구촌의 평화나 반전 평화와 같은 거대담론에 참여하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 소송 천국, 극단적 갈등 지옥

한국사회는 소송 천국이다. 법원 행정처가 발간한 '2019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8년 한해 법원에 접수된 소송사건은 658만5580건이다. 하루평균 무려 1만8042건의 소송이 새로 제기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놀랄 수준이다. 알다시피 미국인들은 모든 일을 소송(sue)으로 처리하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변호사가 성업을 한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사기 등 재산 분쟁'의 90%는 중재·조정을 통해 해결한다. 우리는 핏대를 올리며 사기범이라고 단죄하며 고소–기소-유죄가 될 일들의 상당수가 미국에서는 대화와 중재를 통해 해결되고,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과 비교하면 더 놀랍다. 일본은 '고소·고발' 건수가 한국의 50분의 1이다. 인구수를 고려하면 100배 이상이다. 2007년 7월 8일자 매일경제 기사에 의하면 2006년 한해 한국의 민사소송은 일본의 6배, 형사소송은 155배 발생했다고 한다. 무슨 문제나 갈등이 생기면 곧바로 법정으로 끌고 가서 극단적인 싸움을 벌이는 관행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입증할 증거는 빈약하면서도 무작정 소송부터 걸고, 상대방을 괴롭히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고소·고발부터 행하기도 한다. 합리적인 중재나 민사소송으로 끝낼 만한 사안인데도 일단 형사고소부터 제기해 감정싸움이 극에 다다르기도 한다. 이렇게 고소가 빈발하지만 실제 기소율은 20% 미만이다. 그만큼 죄가 될만한 근거도 부족하고 범죄의 구성요건이 충분하지 않은데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래부터 극단적이고 공격적이었을까? 옛날에도 고소·고발을 일삼았을까? 아니다.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지난 5000년 역사 가운데 수많은 침략을 받았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거의 없다. 전쟁은 했지만 대부분 방어 전쟁이었다. 이웃끼리도 오순도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고소가 난무하고 갈등이 첨예화된 것은 아마 근대 이후 특히 서구적 사법제도가 형성된 이래 일어난 현상이다. 물론 과거 조선시대의 법제도나 탐관오리의 득세로 민중들이 그 억울함을 호소할 통로가 없었던 탓에 법에 호소하는 경향이 많아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이고 복합적인 요인들이 배경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급속한 개발과 성장으로 인한 생존과 경쟁 문화의 격화, 소송 제도와 절차 상의 문제,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경험한 억압, 분단이라는 규정적 힘으로 인한 증오와 대결의 문화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사회적 혐오와 차별의 문화는 여전하다. 이념적 혐오, 여성혐오와 차별, 소수자 혐오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장애인과 이주자에 대한 차별은 과거처럼 공공연하지 않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혐오와 차별은 문화적 특성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정치 지형과 매우 밀접하다. 모든 갈등과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는 결국 정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저급한 양당 체제가 갈등 심화의 주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자신들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상대편 진영을 약화시키기 위해 극단적 대결을 기획하고 추진한다. 그래서 모든 정치적 언어가 공격적이고 자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거짓정보와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행위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대결의 양상은 단지 미성숙의 수준이 아니라 야만적이다. 온 국민을 두 패로 나눠 대결구도를 심화시킬 때만 정치적 이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성과 남성을 쪼개어 특정 젠더 그룹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드는 저질 정치인들도 있다. 이처럼 양당 체제가 조성하는 정치문화는 국민들의 갈등과 대결을 양분으로 삼는다. 평화와 국민통합을 이뤄야 할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이 증오와 대결을 부추기고 있으니 사회적 갈등과 갈등의 극단화 경향은 더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만의 평화에서 모두의 평화로

평화를 뜻하는 라틴어에는 '팍스'(Pax)와 '에이레네'(Irene) 두 단어가 있다. 둘 다 로마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그 중 팍스(Pax)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로마의 평화를 Pax Romana라고 부른다. 팍스는 고대 로마인들이 추구한 평화를 잘 나타낸다. 이 평화는 무력과 돈과 법과 제도로 구축된다. 즉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로마는 무력으로 넓은 땅을 정복해 제국을 이뤘고 자신들이 원하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전쟁과 살육을 통해 지탱됐고, 절대 다수의 노예들의 희생 위에 건축됐다. 피정복 국가와 부족에 대한 약탈 위에 지속됐다. 다수의 희생 위에 소수만이 누리는 평화였다. 로마는 단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노예들의 반란과 폭군의 압제와 황제–귀족–시민들간의 힘의 대결이 끊이지 않았다. 힘에 의한 평화, 타자에 대한 정복과 힘의 우위를 전제로 한 평화가 바로 로마의 평화다. 하지만 결코 로마와 로마인들은 평화롭지 않았다.

오늘날 평화와 풍요의 상징으로 알려진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는 로마의 평화와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경쟁에서 승리해 얻는 승자독식의 풍요 속에서 누리는 나와 내 가족만의 웰빙을 평화라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강대국이나 서구 국가들만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평화도 이 흐름을 쫓고 있다. 이처럼 너도 나도 이런 평화만 추구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필요해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백마를 탄 선각자나 하늘의 천사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평화를 위한 쟁투가 필요하다. 평화를 위해 일할 때 비로소 얻어진다. 평화의 시간은 평화로운 사람들의 어울림의 순간이고 평화의 공간은 평화의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에너지장이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적잖다. 어떤 갈등과 이해충돌이 있는 현장에서 지혜로운 중재자로 나서는 일, 거친 언어들이 구사되는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대화 문화를 개선하는 일, 가정과 모임에서 비폭력적 대화를 먼저 실천하는 일, 타인을 배려하고 낯선 스타일과 취향을 존중하는 일, 대결이나 비난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으로 갈등을 처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 자존심을 마구 내세우지 않는 신중함,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침해당하는 순간 이의를 제기하고 사과와 용서로 깔끔하게 처리하는 넉넉함,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극복하며 용서를 선택하는 일, 상대방의 바운더리를 존중하고 함부로 침해하지 않는 신중함도 있어야 한다. 관계 챙김의 지혜를 터득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 약자를 배려하고 소외감이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함께 노력하는 일, 공정과 정의가 뒤틀릴 때 이를 바로 잡는 일, 나의 얼굴과 내면에 평화가 깃들도록 자신의 마음을 챙기는 일, 자신의 공격성과 권력욕과 인정욕구를 인정하고 이를 조절하는 일, 평화와 생명을 위한 활동들에 참여하는 일 등등. 평화운동가나 갈등전환 전문가나 심리상담사들만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종종 음악채널을 시청한다. 어느 아침 한 피아니스트가 해변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피아니스트 임미정이 글린카(M. Glinka)의 종달새와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ff)의 전주곡 op.3 No.2를 연주하고 있었다. 강원도 고성군 명파 해변에서 펼친 이 연주는 2021 PLZ 페스티벌 프로그램의 하나로 진행됐다. PLZ는 '평화와 생명의 지대'(Peace and Life Zone)라는 뜻이다.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와 대조되는 심원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종달새의 목소리를 빌어 평화의 희망을 노래하는 그 연주에 나는 깊이 매료됐다. 우리 사회 전체가 PLZ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철조망은 남과 북 사이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사이, 동(東)과 서(西) 사이, 세대와 세대 사이, 부자와 빈자 사이, 갑과 을 사이, 여성과 남성 사이, 내국인과 이주민 사이, 취향과 취향 사이에도 날카로운 철조망들이 처져 있다. 우리 사회와 일상적 관계 속에 얽혀있는 이 거친 철조망들을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까? 나 자신이 평화의 사람이 되고 평화를 위해 일할 때 그것이 시작될 것이다. 평화와 생명의 지대는 나로부터(from me) 창조된다. 평화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평화가 서로에게 선물이 될 때, 평화의 영토가 더 넓게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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