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진심이라는 거짓말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2-13 09:29:31
  • -
  • +
  • 인쇄


우리는 누군가의 진심을 갈망한다. 그리고 진심에 매료된다. 미심쩍은 진심이라도 진심의 형식을 취하면 그 진심에 맞추어준다. 이것이 진심의 법칙이자 주술이다.

2023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안보윤의 '어떤 진심'은 진심의 어두운 현상학을 잘 보여준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H 목사라는 이름의 종교인은 진심을 담아 말하며 신도들에게 호소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사과한다. 신도인 유란의 엄마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기 비하와 고뇌의 참회조차 서슴지 않는다. '절망에 잠식당한 얼굴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진심을 담아 사과'한다. 그의 사과는 진심으로 받아들여진다. 소설은 그 사과를 이렇게 묘사한다.

'사과받은 이가 진저리를 칠 때까지, 더 이상 사과받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실행하고 말 때까지 집요하게 반복되는 사과'

"여러분,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작고 미력한 존재라 미안합니다. … 사과받는 신도들이 진저리를 칠 때까지, 더 이상 사과 받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실행하고 말 때까지 집요하게 반복되는 사과였다."

그의 말은 진심 어린, 언제나 진정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진심은 사람들을 움직였다. 소설은 그런 진심을 '어떤 진심'이라고 부른다. 진심처럼 보이는 진심, 진심의 문법을 지닌 어떤 것, 집요한 반복과 애절함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움직이는 정체 모를 주문과도 같다는 것일까.

"엄마 좀 도와줘. 유란아. 제발 한 번만. 유란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채감에 시달렸다. … 비난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다음, 또 다음 부탁이 유란을 옭아맸다."

유란의 엄마 역시 언제나 딸에게 그런 방식으로 부탁했다. 명령조가 아닌 호소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유란은 뿌리치지 못한다.

·
소설 속 화자 유란은 엄마를 따라 어떤 종교단체의 건물 안에서 산다. 그는 '성장한 열매'가 되어 포교 활동을 한다. 유란은 무료 과외를 해 주면서 이서를 씨앗으로 포섭하여 발아하게 한다. 유란은 진심을 가지고 이서를 돕는다. 둘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이서는 유란을 언니로 부른다. 유란은 이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말 열심히 할게. 나 좀 도와줘, 이서야." 엄마가 유란에게 말하는 방식, H가 신도들에게 말하는 방식이 재현된다.

이서는 유란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신뢰한다. 그리고 열매로 자라난다. 유란의 마음속에 맴돌던 의문은 심리적 무거움이 된다. "유란은 그런 이서의 의존과 맹목을 부담스러웠다." 유란은 계속 '진심'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진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마치, 진심 같았다.… 어떤 진심은 진심이라서 한심했다. 어떤 진심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속 복숭아처럼 쇄 냄새를 풍기며 삭았다. 어떤 진심은 추해졌고 어떤 진심은 다만 견디는 삶으로 전락했다."

"아직 지우지 못한 문장이 하나 남아 입 속을 맴돌았다. 이젠 누구도 진심이 아닌 곳에 왜 열매들만이, 오직 열매들만이 진심인 채로 남아있을까."

한 때 진심에 매료되었던 이들은 이제 진심을 망각하고 진심의 형식에만 노련해지고, 이제 그 진심의 장에 포획된 다른 사람들이 진심의 주술사로 변모해 간다.

·
그런 진심은 예외적인 걸까? 가스라이팅과 세뇌가 체질화된 어떤 사이비 종교단체에서나 있음직한 일로 읽으면 안보윤의 '어떤 진심'에 대한 단편적 독해일 것이다. 가정에서도, 조직에서도, 여러 관계들 속에서도 그런 진심은 번식하고 있다. ‘어떤 진심’의 특징은 이기적일 뿐 아니라 타자를 통제하고 조종하려 든다는 점이다.

'어떤 진심'과 같은 진심이 어디 소설 속에만 존재할까? 우리 일상과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진심들의 서사에 진저머리치고 있지 않는가.  권력자와 정치인들의 단호한 얼굴과 찬란한 약속들 속에서, 전쟁터의 사령관들과 그 진심에 눈물 흘리는 병사들에게서, 온갖 인터뷰나 영상 콘텐츠에서 우리는 진심이라는 천박한 키치를 쉬 목격한다. 슬프게도 어떤 진심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잘 먹혀든다. 게다가 우리의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대화와 다툼, 거래들 속에서도 진심의 마법은 효능을 발휘한다. 그래서 진심 어린 사과, 사랑, 부탁, 약속, 노력이란 말이 널리 유통되고 연출된다.

소설 속 화자의 독백은 다소 허무주의적이다.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지났음을 애써 폭로하는 데 그친다. 아직 고장난 진심의 회로를 다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야 하고, 보다 깊이 인식하여 완전히 탈주해야 하지 않을까. 진심이라는 언어와 표정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관계의 수평적 배치일 것이다.

그럴싸한 통조림을 보면 역겨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을 지녀야 한다. 나아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매 순간 '나의 진심'을 넘어서야 한다. 그 질문은 단순하다. ‘이 관계 안에서 에너지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진짜 돈이 들어간 '돈방석·돈지갑' 나왔다

진짜 돈이 들어간 '돈방석'이 나왔다. 한국조폐공사는 진짜 돈이 담긴 화폐 굿즈 신제품 돈방석·돈지갑을 출시하고, 지난 23일 오후 2시부터 와디

파리크라상 '사업부문'과 '투자·관리부문'으로 물적분할한다

SPC그룹 계열사인 ㈜파리크라상이 물적분할을 진행한다.SPC그룹은 지난 21일 이사회에서 계열사인 파리크라상에 대해 물적 분할을 결정했다고 24일 밝혔

광명시, 포스코이앤씨 공사장 오폐수 무단방류로 고발

포스코이앤씨가 오폐수 무단방류 혐의로 광명시로부터 고발당했다.경기도 광명시는 서울~광명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원광명지하차도 터파기 과정에

'온실가스 배출권' 24일부터 증권사에서 주식처럼 거래

24일부터 '온실가스 배출권'을 증권사에서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다.지금까지 온실가스 배출권을 할당받은 기업들은 한국거래소를 통해 배출권을 직접

하나금융, 금융권 최초 '2024 지속가능성 KSSB 보고서' 발간

하나금융그룹은 지속가능성 의무공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금융권 최초로 '2024 지속가능성 KSSB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4일 밝혔다.이번 보고서

농심 조용철 부사장,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

농심은 조용철(63) 영업부문장 부사장을 12월 1일부로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내정했다고 21일 밝혔다.신임 조용철 사장은 내년 3월 열리는 정기주주총

기후/환경

+

올겨울 해수온 상승에 덜 춥다...때때로 '한파·폭설'

올겨울은 해수온 상승에 영향을 받아 예년에 비해 전반적으로 추위가 덜하겠지만 때때로 강력한 한파와 폭설이 찾아올 수 있겠다.24일 기상청이 발표

지금도 난리인데...2100년 '극한호우' 41% 더 강력

탄소배출이 계속 늘어나면 2100년에 '극한호우'가 41% 더 강력해질 것이라는 예측이다.미국 텍사스A&M대학교 핑 창 박사연구팀은 기존 기후모델보다 4

美 민간 기후데이터 시장 '세력확장'...정부 관련조직 축소탓

미국 정부가 기후관련 예산과 조직을 대폭 축소하면서, 민간 기후데이터 기업들이 이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급성장하고 있다.22일(현지시간) 글로벌 분

4만년 잠들었던 알래스카 미생물 '부활'…기후위기 '새 변수'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에서 4만년간 잠들어있던 미생물이 온난화로 인해 되살아나면서 기후위기의 새로운 변수로 부상할 가능성이 제기됐다.22일(현지

[COP30] 화석연료에 산림벌채 종식 로드맵도 빠졌다

브라질 벨렝에서 지난 22일(현지시간) 폐막한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 최종 합의문에는 화석연료뿐만 아니라 산림벌채 종식에 대한

'온실가스 배출권' 24일부터 증권사에서 주식처럼 거래

24일부터 '온실가스 배출권'을 증권사에서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다.지금까지 온실가스 배출권을 할당받은 기업들은 한국거래소를 통해 배출권을 직접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