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인 작가들이 그려내는 '한글, 희망을 전하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1-10-20 18: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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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공간 곳곳에 꽃작품 전시 '희망 전달'
도공의 아내 '백파선' 코너로 女존재 강조
▲ 한글날 서울 인사동 '코트'에서 열린 '한글, 희망을 전하다' 전시회


10월 9일 한글날, 서울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한글, 희망을 전하다'라는 주제로 10일간 열린 이 전시회에 33인의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했다. '희망'이라는 화두 하나를 붙잡고 공간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취재했다. KOTE 공간에 펼쳐진 작품들과 온갖 기호들은 새롭고도 낯선 방식으로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 KOTE : 희망의 공간

코트(KOTE)는 피맛골 골목에 맞닿아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본관과 별관, 카페와 야외카페, 공유도서관인 '내면의 서재', 사무실용 빌딩 등 5개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다. 본관 2층은 문화예술인과 작가들을 위한 공유사무실로 꾸며 작가들이 개인 창작과 협업으로 함께 문화예술활동을 하도록 개방·임대하고 있다. KOTE는 벽돌로 건축돼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낡은 건물이다. KOTE 담벼락 너머로 초대형건물 공사장이 펼쳐져 있다. 취재하는 나에게 KOTE는 마치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에서 문화예술거리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최후의 보루처럼 느껴졌다.

코트랩(KOTE Lab)은 스스로는 '경계의 창작자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천명한다. 다양한 경계의 창작자들이 교류하는 살롱으로서 함께 이어지고 교우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에게 신선한 영감의 충돌을 일으켜 새로운 문화적 실험을 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KOTE의 미션은 △Explore(끊임없는 도전과 탐험) △Connect(사람과 사람, 과거와 미래, 예술과 문화를 잇는 가교) △Inspire(도전적이고도 독립적인 영감)이다. 이 전시회가 KOTE라는 경계지점에서 열렸다는 것은 적잖은 의미가 있다. 쇠락해 가는 문화예술 거리 인사동의 경계에서 어떤 희망의 신호를 발신하고 있는 것같다. 인사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피맛골은 잠들지 않는다.


◇ 한글로 희망을 찾다


희망!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그래, 희망을 가지자! 절망하지 말자! 좀 더 힘을 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게 된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듯, '한글날' 역시 우리를 각성시킨다. 한글이라는 우리말을 다시금 인식하고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 민족에 대한 기억과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공동기획자 이혜경 백파선콘텐츠연구소 대표는 이 전시회의 목적을 "지난 2년동안 코로나19로 우울하고 지치고 수고한 모든 이들을 격려하고 희망을 전하고자 이 전시회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한글날을 전시회 오픈일로 정한 이후, 함께 모여 한글 자음을 통해 희망을 주는 단어를 찾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가령 기역(ㄱ)에서는 '기쁨, 공유, 꽃' 등의 낱말을, 니은(ㄴ)에서는 '나, 너, 나눔'을, 디귿(ㄷ)에서는 '도움, 다정함'을, 미음(ㅁ)에서는 '믿음'을, 시옷(ㅅ)에서는 '사랑'을, 피읖(ㅍ)에서는 '핑크, 평화'를, 히읗(ㅎ)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는 식이다.

이렇게 우리말에서 희망의 언어를 발굴해 '사랑'을 거쳐 '희망'으로까지 나아가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한글이 주는 매력과 '희망의 언어'가 주는 힘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찾는 방법'에 대해 신선한 지혜를 안겨다 준다. 희망과 생명의 언어를 찾아내고 우리 입으로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부정적인 언어를 내뱉으며 자신의 활력과 에너지를 감소시키는 일을 그만 두고 '희망'의 말을 나누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희망'을 전하고자 이 전시회를 기획했다고 말하는 이혜경 대표.

◇ 꽃, 그 순간의 힘

꽃 프로젝트는 이 전시회의 주요 콘셉트 중 하나다. 본관 1층 200평의 공간 여기저기에 만개한 꽃 작품들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꽃은 식물의 아름다움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그 색채와 기하학적 꽃차례와 그윽한 향기는 꽃으로 빨려들게 한다. 이 행사의 공동기획자이자 꽃 조형 작가인 한선우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 작가들의 그림들은 형형색색 꽃들의 정취를 물씬 전해주었다.

'꽃'은 희망의 은유일 뿐 아니라 희망을 피어내는 힘으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작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꽃'의 형체와 색조만이 아니라 꽃이 개화하는 순간의 특이 현상을 알게 됐다. 씨앗은 오록 꽃을 향한다. 더구나 식물들은 꽃봉오리를 열며 꽃을 피워낼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투입한다고 한다. 이른 새벽 연밭이나 꽃밭에서 꽃이 피어날 때 꽃잎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꽃을 피워내는 힘은 희망의 힘이다. 개화를 위해 자기 존재의 모든 힘을 모아 꽃잎을 열어젖히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색다른 힘을 준다. 아직 꽃잎을 채 열지 않았지만,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꽃을 피워내는 열망 말이다.

▲한선우 작가 작품의 꽃 작품

◇ 백파선, 희망을 발굴하다

전시회장 한켠에 특이한 코너가 하나 있었다. '백파선' 전시장이다. 백파선(百婆仙)은 조선시대의 여인이다. 그녀는 정유재란(1597년)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아내로서 이후 일본 도자기 산업의 신화가 된 여인이다. 그래서 백파선 코너의 데스크에는 '도자기의 혼이 된 여인'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400여년전 일본에 끌려간 한 여인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백파선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주고 있을까?

백파선콘텐츠연구소 이혜경 대표는 백파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발굴해야 할 여성 리더십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조상 중에 여성으로서 영향력을 끼친 여성 리더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다. 남성중심의 질서 속에서 귀감이 되는 여성들의 존재와 리더십이 가려졌고 역사적 기록과 사료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백파선은 장인(匠人) 즉 도자기 아티스트였다. 여성의 몸이었지만 이국땅에서 올곧은 장인정신과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여 조선인 도공 공동체를 이끌었다. 이들이 만든 도자기와 그릇들은 당시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았고 이후 아리타 도자기의 모체가 됐다. 조선 도공의 혼이 일본 땅에 여전히 살아있고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사뭇 낯설고 생경한 소식이다.

백파선 도자기가 바로 우리의 것임을 재확인하는 작업은 우리 전통 중에서 한복이나 서예만이 아니라 도자기 역시 우리의 소중한 문화콘텐츠로 세워나가는 노력이 된다. 특히 '백파선' 발굴은 냉각된 한일관계를 문화예술을 통해 풀어나가는 민간교류의 가치도 크다. 예민한 대일 민족감정이나 정치적 흐름을 벗어나 백파선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도자기를 매개로 두 나라의 문화예술인들과 시민들을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전란의 희생자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은 역사 속에 숨겨진 하나의 비극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앙처럼 자신에게 닥쳐온 가혹한 운명과 타국살이의 설움을 극복하며 마침내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로 우뚝 선 백파선의 스토리는 극적인 반전과도 같은 이야기다. 그녀의 스토리를 듣는 이는 자신이 그 어떤 상황에 내던져지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으리라는 견딤과 일어섬의 용기를 얻게 된다. 희망의 힘이자 현실에 굴하지 않는 자기 극복의 힘이다. 이처럼 백파선 스토리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희망의 사인이 된다. 감염병이라는 재난 속에 내던져진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함을,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꿋꿋이 살아낼 힘을 안겨다 주는.


◇ 절벽이 희망이다

취재 중 이상미 작가의 작품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절벽'을 다룬 이상미 작가의 작품에서 희망의 역설적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상미 작가는 섬유예술 작가(Fiber Artist)로서 한국 섬유예술의 지평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있는 작가다. 이 전시회에서는 '절벽'과 'Stop and smell the roses!' 이 두 가지 주제로 10편의 작품을 전시했다. 캔버스 위에 실과 천을 사용해, 자수와 콜라주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특이한 방식의 작품들이다. 이상미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절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벽……. 마음이 갈래갈래 갈라져 생긴 깊은 골이 '절벽'이다. 이제 그 절벽에서는 모든 기억들이 넘쳐 소멸된다. 삶의 속도도 멈췄다. 아프고 두렵고 아름다운 절벽이다. 평지인 줄 착각했던 공간, 순간 외줄을 타고 있다는 자각의 순간부터 균형을 잡으려 했던 애처로운 몸짓, 사실은 절벽끝이었다.

명료해진 나는 수직의 절벽을 마주한다. 어지럼증을 느낀다. 절벽이 서서히 움직인다. 그것은 지평선도 되고, 수평선도 된다. 절벽이 회전하면 공간이 변한다. 공간이 의식의 흐름도 바꾼다. 나는 거기에 서있다."


희망을 말하는 전시회에서 '절벽'을 말하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작가노트에 의하면 절벽은 바로 작가의 실존의 상태이다. 아니 절벽은 우리 모두의 실존의 위상학이기도 하다. 작가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절벽을 움직여 펼치면 평지가 된다고. 지평선도 되고 수평선도 된다고.

바로 이 지점에 희망의 역설이 담겨 있는 듯하다. 절벽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를 바꿀 때 다른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절벽이라는 절대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은 어떻게 찾아올까? 절벽에서 희망의 언어를 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절벽 위에서 멀리 희망의 땅을 바라보는 일도 가능하다. 이상미 작가는 그 너머의 것을 말한다. 절벽이 곧 희망이라고.

▲이상미 작가의 '절벽'과 '바람'을 주제로 한 작품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재난의 절벽, 오징어게임에 내몰린 운명처럼 생존의 절벽 끝에 서있는 우리들에게 KOTE와 33인의 작품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희망을 말해준다.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고 우리 속에 희망의 꽃을 피워주고 희망의 사람을 소개한다. 무엇보다도 절벽과 절망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준다. 희망을 말하면 희망을 갖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함께 증언하게 될 것이다. 그 희망은 바로 우리들 안에서 피워낸 것이라고. KOTE에 모인 33인과 모든 관람자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함께 하는 것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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