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모두를 위한 일자리는 없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4-06 0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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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밀린 노동은 주변화되며 가치 변해
좋은 노동생태계 위한 사회적 합의 시급해


얼마전 뉴스트리 기자들과 가진 모임에서 한 기자에게 대뜸 물었다. "왜 기자가 되셨나요?" 그러자 한 20대 여기자는 이렇게 답했다. "내 이름으로 쓴 기사가 남잖아요!"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분명하게 답하는 친구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글을 남길 수 있는 기자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고. 이 이야기는 요즘 청년세대의 일과 직업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싶어하는 청년세대들. 하지만 급변하는 산업생태계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의 의미와 행복한 노동은 몽상처럼 느껴진다.

'노동 4.0' 시대다. 물질 노동에서 비물질 노동으로 전환되고, 지식정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 주를 이루는 시대다. 이런 변화는 디지털혁명과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 4.0 시대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생산의 자동화와 AI 등장으로 노동자가 기계의 보조자 혹은 관리자가 되며 '노동의 주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이나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금융업무도 인터넷뱅킹, 무인 입출금기, 인터넷직거래 보험, 인터넷은행 등을 이용한다. 그만큼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예민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업은 사실 이런 맥락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단지 청년들간의 취업경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비극이 심화되고 있다.

노동이 점점 단순해지면서 주변화되는 현상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재화 획득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질과 행복을 좌우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거대 기업과 플랫폼 기업들이 대부분의 수익을 전유해 양극화의 폭이 점점 커지고 있다. 1%대 99%의 세상이 현실화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모든 사람에게 장밋빛 미래를 안겨다 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성실하게 일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삶과 노동은 더 황폐화되고 있으며 미래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 노동4.0 시대···주변화되는 노동의 가치

지금까지 모든 정부가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 대책마련에 힘썼지만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규직 고용비율도 너무 낮다. 설사 취업해도 오래 다니지 않는다. 그만큼 노동조건이 열악하거나 일터가 행복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3일 발표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청년 사회 첫 출발 실태 및 정책방안 연구I:일자리' 보고서에 따르면, 취업청년 4명 중 1명은 4인 이하 소규모 직장에서 첫 일을 시작했다. 첫 일자리의 근속기간은 3년 미만이 63.9%로 가장 많았다. 첫 일터의 평균 근속기간은 33.3개월로 나타났다. 정규직은 66.6%, 비정규직은 33.4%였다. 미취업자와 비정규직 취업자를 합하면 수백만 청년들이 그야말로 취약한 환경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2017년 독일 정부는 노동시장과 직업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대미문의 변화에 대한 대응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토론과 사회적 논의를 거쳐 '노동4.0 백서'(Günbush Arbeiten 4.0)를 발간했다. 핵심 화두는 "디지털화되는 사회변동 속에서 '좋은 노동'이라는 이상은 어떻게 유지되고 강화될 수 있을까?"였다. 독일 정부는 디지털화에 따른 노동 시장의 변화가 양극화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노동의 변화 속에서 상생이 가능하게끔 고용주와 노동자간의 대화와 합의를 이루도록 추진했다. 백서는 행복하고도 질좋은 노동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생산이익 분배, 플랫폼 대기업의 이윤에 대한 세금부과 문제, 공공재와 서비스 영역의 현대적 인프라 구축 등 거시 경제 차원의 틀을 만들고, 그에 따라 세부적인 노동 정책을 짜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이명호 <노동4.0>] 이런 정책을 통해 독일이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국민 100퍼센트의 노동'이다.

이 백서는 '모두를 위한 일자리 마련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직업을 가지고 노동 시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재화를 벌어들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업과 노동이란 한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 사회적 인정과 관계의 핵심을 구성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 개인의 삶과 역사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모두 적정한 보수를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이는 독일 사회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이 추구하는 노동의 가치는 좋은 노동(Gute Arbeit) 혹은 인간적인 노동(menschlich Arbeit)이다. 인간적인 노동이란 일하는 노동자의 자질과 기술이 종사하는 노동에 합당할 뿐 아니라, 개인의 역량과 잠재력을 발휘하고 개발할 수 있어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차원에서 모두 만족스런 상태에 도달한 이상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노동정책은 과거 산업시대의 개발과 성장 마인드에 여전히 갇혀있다. 경제성장과 국내총생산(GDP) 수치를 절대 가치로 여기고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노동'이라는 의제가 거의 실종됐다. 오히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말이 자주 언급됐다. 이는 단지 규제를 줄이겠다는 의미 외에 기업에 세제혜택을 제공하고 저임금과 비정규직 채용과 광범위한 실업자 형성으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이는 다수 시민들의 불행한 삶과 불행한 노동을 전제로 하므로 우려가 적잖다. 노동은 생계의 수단이자 자기 성취의 길이기도 하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과 직결된다. 노동할 권리와 그 노동을 통해 만족감을 누릴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 평생직장 옛말···스스로 학습력 키워야

사회 정책이나 노동 정책만 탓할 수 없다. 개인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급격한 노동 환경의 변화를 읽어내고 미래를 예견해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일이다. 평생직장이란 말은 사라진지 오래다. 평생 직업이라는 꿈도 허황되다. 이제 학력이나 학벌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소위 철밥통 직장들도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의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이고 항상적인 이직(移職)이 당연시 되는 수준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에 내몰리느냐, 아니면 유목하는 노동을 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학습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변화하는 상황에 민첩하게 반응하며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대처하는 배움의 힘이 그것이다. 다양한 기술을 익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다양한 업종의 일을 경험하고, 노동과 여가의 균형을 스스로 조절하고, 새로운 직업을 창조하기도 하는 감각이 중요해지고 있다. 조직이나 기업에 속해 일하기보다 독립적으로 일을 하는 인디펜던스 잡이 주목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업도 변해야 한다. '뉴 엘리트'(New Elite)의 저자 표트르 펠릭스 그지바치는 종업원들이 보람을 느끼고 일의 의욕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기업이 임금이나 복지나 근무환경을 넘어서는 차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세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 목적–일에 의미가 있는가. 둘째, 성장–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가. 셋째, 자율–선택지가 늘어나는가.

노동자가 회사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아야 할 뿐 아니라 일을 통해 자신이 성장해야 한다. 또 자기를 실현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요즘 국제 표준으로 강조되고 있는 ESG경영에서도 노동은 S(사회적 책임, social responsibility)와 관련되는 핵심적 요소다. E(환경, environment)와 G(지배구조, governance)에만 집중해 탄소배출 기준이나 기업의 지배구조와 관련된 혁신을 행한다고 절로 ESG경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을 외면하고 얕은 욕심으로 경영하는 행위는 진정성이 없는 ESG워싱(위장 ESG)을 하는 행태다. 재무 즉 '돈' 이외의 요소가 기업 경영과 가치에서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앞으로 노동과 인권이 ESG 평가의 가장 중요한 쟁점과 기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기업도 건강한 경영·노동 가치를 학습해야 한다. 사람 중심의 노동, 사람 중심의 경영을 내면화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가 크게 변모하고 있다. 고액연봉을 기업 선택의 절대적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점점 사라지고,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직업 선택을 신중하게 하고, 자신의 행복과 성장을 위해 기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따라서 기업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가 결합되도록 힘쓰지 않는 기업은 좋은 인재를 얻지 못하거나 놓치게 된다. 더구나 갑질을 일삼거나 의사소통이 일방적이고 통제적인 조직문화를 지닌 기업일수록 이직율이 높아지고 결국 좋은 인재들이 회피하는 기업이 되고야 만다.

청교도의 신조처럼 노동은 단지 신성한 소명이 아니다. 신성한 권리이기도 하다. 노동없는 사회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노동이 천시되고 노동없는 부의 획득이 당연시되고 칭송받는 사회는 부패한 사회다. 좋은 노동, 인간적인 노동이 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기업은 노동자를 동반자로 생각하고, 정부는 건강한 기업·노동 생태계를 마련해야 한다. 노동자가 디지털 기술에 의해 밀려나 주변화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된다면 우리 사회와 다음 세대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이다. 건강한 노동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정부와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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