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친구가 많은데 왜 외로울까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6-07 10: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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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사회'지만 친구 없는 사람 많아
친구는 합류하여 흘러가는 관계의 여정

지구촌 모든 사람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초연결시대이다. 역설적이게도 고립과 단절이 깊은 시대이기도 하다. 연결의 망이 자유롭고 넓고 촘촘하지만 의외로 외로운 사람이 많다. 친구가 없거나 적기 때문이다. 친구란 단지 '아는 사람'이 아니다. 친밀한 사람이요 신뢰하는 관계이며 서로가 공유하는 감정과 따스한 스토리가 있는 만남이다. 친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친구 관계는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차원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친구 경험이 많을수록 인생을 넓게 산 것이요, 친구 경험이 깊을수록 인생을 깊게 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많은 철학자와 현자, 지식인들이 친구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개의 육체에 깃들인 하나의 영혼이다'고 말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친구란 나의 기쁨을 배로 하고 슬픔을 반으로 한다'고 그 소중함을 말했다. 서양 속담에는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동양의 고사성어에도 지음, 지기지우, 죽마지우, 지란지교, 막연지교, 관포지교 등 우정을 나타내는 고상한 말들이 많다. '친구' 혹은 '우정'만큼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는 말은 없을 것이다.

◇ 친구라는 말, 크게 오염돼 있어

하지만 '친구'라는 말처럼 형편없이 오염된 언어가 없다. 조폭 영화 <친구>가 그려내는 우정이 그 하나다. 세 사람의 비행청소년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지만 공공연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것은 '주먹세계에는 진정한 우정이 있다. 목숨 걸고 친구를 지키고 친구를 위해서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심지어 친구를 위해 여자 친구도 포기하고 줄 수 있다'는 메시지다. 가장 왜곡되고 일그러진 우정을 아름답게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말하는 '친구' 역시 통속적이다. 사업의 세계에서 인맥은 인간관계 자본(social capital)이 된다. 인맥을 소중히 여기고 관리하고 친구의 친구를 접촉해 그 관계망을 넓혀나가는 것이 사업 확장과 리더십의 요체가 된다. 페이스북에서는 '친구'(friend)를 가장 성공적으로 사업화했다. 온라인으로 연결만 되면 친구가 된다. 물론 언제든 끊기와 차단을 할 수도 있다. 친구라는 말이 오염된 또 하나의 현장은 정치와 이념의 세계다.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위계적 호칭을 버리고 서로 '동무'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이 동무다. 동무가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생각과 노선이 달라지면 돌연 적이 되어버리고 처단 대상이 된다.

요즘 사람들은 친구란 가벼운 관계라고 생각한다. 서로 부담을 주지 않고 만나는 관계로 생각한다.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가볍게 만나 한 잔 하고 이야기나 나누며 웃고 즐길 수 있는 관계가 그것이다. 이런 부담없는 관계가 친구의 전부라면 모든 사람이 많은 친구를 사귀고 있으며, 이 세상에는 수천억 이상의 친구관계가 있을 것이다.

◇ 친구는 최고의 관계성

친구가 된다는 것은 단지 편한 관계, 가벼운 관계, 부담없는 관계를 맺는다는 이상의 것이 있다. 친구됨은 관계의 순수하고 지고한 차원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부부 사이가 친밀해지고 다정하면 서로 닮게 되고 친구처럼 된다고 한다.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정염의 관계를 지나 성숙한 우정과 친밀함의 관계로 나아간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깊어지고 벽이 없으면 친구처럼 된다. 양육과 보호–의존과 훈육의 관계를 넘어 친구처럼 그 관계가 변형되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혹은 교사와 학생 사이도 마찬가지다. 도반이 된다. 리더와 맴버, 상사와 부하도 상호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면 친구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반려동물이나 식물과도 우정에 가까운 교감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관계성 속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라는 말을 즐겨하지만 친구가 될 줄 모른다.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놓아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깝고 친밀하되 상호 속박이 없는 것이 친구 사이다. 집요하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자신의 정서적 만족만을 구하려 한다면 억압이 될 수도 있다. 친구 사이에는 의무가 없다. 상호적인 교감과 나눔이 그 요체다. 그러므로 나에게 이익과 기쁨을 주는 사람만을 골라 특별한 관계를 맺거나, 상대방의 꽃과 잎과 열매와 진액까지 빼먹겠다고 든다면 무늬만 친구일 것이다. 상대방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이는 이미 친구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관계는 상생의 민주주의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합류적 사랑을 강조한다. 그는 이를 에로스 즉 낭만적 사랑과 대조하며 관계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는 낭만적 사랑은 서로 매혹되고 연결되는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에 크게 의존한다고 본다. 즉 파트너들은 서로 투사함으로써 일체감을 강화한다. 이 사랑은 열정적 사랑(amour passion)이며, 영원하고 하나뿐이며 유일한 관계성을 자처한다.

반면 합류적 사랑은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는 관계성이다. 이 관계는 능동적이며 상호적이다. 타자의 인격적 자율성을 존중한다. 이 관계는 친밀함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관계의 발전으로 나아간다. 낭만적 사랑은 그 특별한 관계성을 고착화하여 관계의 발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쉬 파탄으로 이어지지만, 합류적 사랑은 그 미규정적 열림으로 인해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과 자기를 기꺼이 열어 보이는 개방성으로 함께 성숙하게 된다. 앤소니 기든스가 말하는 합류적 사랑은 친구 관계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 친구됨의 선택

처음부터 친구로 만들어진 관계는 없을 것이다. 친구관계는 상호적이지만 누군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될 때 친구 관계가 시작되고 자라나는 법이다. 어떤 사람은 친구의 범위를 좁게 잡고 소수의 친구만 둔다. 어떤 사람은 널리 인간관계를 맺고 많은 친구들을 사귄다. 친구의 범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친구 관계의 폭도 달라질 것이다. 성격이나 친구 맺기의 스타일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본질은 같을 게다. 그것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내가 좋은 친구 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친구 하기'라는 능동적 태도를 지닐 때 합류하여 함께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20년 전 해외에 체류할 때 가끔 변화심리학 강연자 앤서니 라빈스(Anthony Robbins)의 강연을 시청했다. 그는 분주하게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활동하는 인기 강연자이다. '네 속에 잠자는 거인을 깨워라'라는 메시지나 '먼저 살부터 빼고 체중부터 줄여라'는 도식적인 결론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관은 사뭇 흥미로웠다. 그는 친구가 아주 많다.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몇몇 전직 대통령, 유명 기업가, 정치인, 스타들, 가난한 서민 등 친구층이 폭넓고 다양하다. 그는 자기가 한번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면 그 사람을 자기의 친구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내 친구'라고 소개한다. 그러면 정말 친구 관계가 된다고 한다.

앤서니 라빈스는 비록 쇼맨십에 능숙한 강연자지만 그의 친구철학은 귀 기울일 만하다. 그처럼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친구됨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그의 친구임을 선언하고 친구가 되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친구됨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친구는 평등하고 대등하다. 수평적이다. 친구 사이는 신분을 초월한다. 계층과 성별, 나아가 나이의 경계까지 넘어선다. 친구는 자신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인다. 높낮이를 만들지 않으며 경쟁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상대방의 기대와 요구를 채워주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친구는 서로를 심판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함께 있기만 해도 편하다. 무엇보다도 친구는 서로를 알아간다. 그 과정에서 삶의 공통경험과 새로운 이야기들을 더불어 만들어간다. 친구는 함께 합류해 흘러가는 삶의 여정이자 관계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고 함석헌 선생의 시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가 떠오른다. '그런 친구'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먼저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friendship)는 고정된 관계명사가 아니라 친구 되기(becoming friend) 혹은 친구 하기(doing friend)와 같은 동사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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