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8-18 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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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사회지만 얼굴 마주하는 만남 필요해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법 발견해야


"2021년 1월 4일 독일의 한 작은 마을 독립서점 주인장이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0년 역사의 독립서점. 그는 70여년의 시간을 책방에서 보냈고 그 책방에서 눈을 감았다. 책방지기는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시대가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더 힘들었다면서 '여전히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미래의 위기와 관계없이 매일 매장을 열 거예요'라고 말했다."


전주 원도심에 있는 '책방 토닥토닥'의 문주현 대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이란 책에서 소개한 이야기다. 이 대목을 읽으며 잔잔한 향기를 느꼈다. 그곳을 방문하는 주민들을 맞이하는 주인장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책방에 가득한 책내음과 책갈피 넘기는 소리를 느껴보았다. 그 책방 공간이 더없이 숭고해 보였다.

◇ 글로벌 공동체라는 환상

오늘날 이 책방과 같은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주로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다. 소통이나 만남 역시 온라인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다양한 소셜서비스(SNS) 공간, 온라인 카페와 클럽, 온라인 게임, 온라인 거래 등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이 대부분이다. 더러는 이를 가상공동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비대면 강의와 회의에 익숙해지고 온갖 금융업무나 상품구매도 온라인으로 한다. 멀리 있는 친구나 가족도 스마트폰 화면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 쉽게 연결될 수 있고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으며 국경을 넘어 폭넓게 접촉할 수 있는 '초연결사회'다.

지난 2017년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선언'이라는 공개 편지를 발표했다. 편지의 제목은 '글로벌 공동체 세우기'(Building global community)이고 수신자는 '우리의 공동체'(Our community)다. 그는 페이스북으로 사람들을 공동체에 소속하도록 돕고 이 공간을 안전하고 가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한 기업의 가치선언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공동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자기 얼굴 이미지나 생각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글과 사진과 영상을 주고받지만 눈빛을 주고받을 순 없다.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 온라인 친구들은 내게 말을 걸 수는 있어도 따뜻한 음식과 차를 주지는 못한다." 만일 저커버그가 말하는 것처럼 온라인 연결을 공동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런 공동체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아니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얼굴을 마주하는 공동체

3년 전 가을, 서울 도봉구에 소재한 오늘공동체에 초대를 받았다. 매월 한 번 모이는 공동체 파티였다. 실내공간은 초록색 천과 황토빛 장식으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날 파티를 담당한 회원들은 다채로운 멕시칸 요리를 준비했다. 각종 레시피를 구하고 여러 번의 요리 연습과 시식을 거쳐 장만한 정성스런 음식이었다. 음악과 댄스 등 흥겨운 공연이 이어졌다. 100명에 가까운 참가자들은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고 음식과 공연을 즐겼다.

그 자리에서 공동체 식구가 아닌 사람들이 여럿 초대받았다. 공동체가 소재한 동네 골목에 사는 이웃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미전향 양심수로 오랜세월 갇혀 지낸 한 할아버지를 초대했다. 오늘공동체는 그분을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교우하며 돌보았다고 한다. 나 역시 특강 강사를 한 인연으로 초대받았다. 나에게 특이한 기쁨이 넘쳐났다. 맛난 음식과 흥겨운 라틴 음악과 춤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공동체 식구들의 넘치는 즐거움과 이웃을 초대해 접대하는 그 마음씀에 전율했기 때문이다. 친한 사람들만 초대한 것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 모두가 잊어버린 한 사람을 기억하는 그 열림에 감동받았다.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공동체란 무엇일까?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가상의 공동체도 불가피하다. 다양한 가치와 이익과 취미에 따라 모이는 다양한 공동체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타인에게 열려있지 않으면 폐쇄적인 게토가 되어 버린다. 이해관계가 같은 이들끼리만 똘똘 뭉치면 패거리로 변하기 쉽다. 손님을 맞이하는 열림, 작은 자와 약자를 돌보는 나눔과 공유의 정신이 없으면 공동체란 이름은 허울 좋은 구호나 간판이 되어 버린다. 온라인상의 공동체는 흔하다. 스마트폰만 열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공동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다. 얼굴을 마주하는 공동체, 살과 살이 접촉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닐까?

◇ 에피쿠로스 정원의 사색과 환대

요즘 서구에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그간 에피쿠로스 학파와 그 정원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벗겨내는 여러 실증적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보통 '쾌락주의'라고 말하는데 이 '쾌락'이란 육체적 향락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을 뜻한다. "너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배려하라!" 이 화두 속에 그의 가르침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이 자기 행복의 원천을 알지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타락시아(ataraxia, 근심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설파했다. 불가능한 야망, 자의식, 두려움 등의 정신적 짐을 내려놓을 때 아타락시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아테네 외곽 시골에서 제자들과 함께 사색의 삶을 추구했다. 그것이 그의 정원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익명의 삶을 강조했다. 학생들은 정원에서 직접 먹거리를 재배하고 양상추와 채소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며 공부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생태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이다. 정원 학교는 당시 여러 철학 학파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정원이 지닌 환대와 평등주의적 가치이다. 학교는 경쟁적이지 않았고, 학생들은 스스로 점수를 매겼다. 입회의 자격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누구든 정제된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면 환영받았다. 형제애가 강조되었고 성별과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비그리스인, 노예, 흑인, 성노동 여성들도 받아들였다. 교육비는 무료였다. 이는 당시 특정 계급의 자제만이 입회가 허용되는 풍토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아니 유일했다.

정원의 문 위에서는 이런 현판이 달려 있었다. "손님이여, 당신은 이곳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이곳에서 쾌락(기쁨)은 최고선이다." 당시 이 정원을 와인에 만취된 채 난잡한 생활을 하는 집단으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원에 방문하는 사람은 전혀 새로운 삶을 목격했다. 초대받은 손님들이 그곳에 들어가면 잘 끓인 포리지(porridge) 한 그릇과 물 한 잔을 대접받았다. 공동체의 분위기는 우정으로 가득하고 생활은 소박하고 절제된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와 학생들은 우정과 소박한 식사, 모두가 함께 가꾸는 정원, 철학적 사색과 대화, 가끔은 질 좋은 치즈와 작은 잔에 담긴 와인 한 잔을 좋아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 이야기는 고요히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소유와 성공강박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모습, 미디어와 온갖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사유하는 힘을 망각해 버린 내면, 마냥 여유없이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 일상을 깊이 검토하게 만든다.

얼마전 KBS1에서 방영한 '걸어서 세계 속으로' 겨울아일랜드 편에서 바닷가 마을의 연어훈제 작업실에서 일하는 한 남성의 모습을 봤다. 그는 연어의 살을 발라내고 가시를 뽑고 훈제해 포장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였다. 어릴 때부터 이 일을 했다고 한다. 매일의 일상과 노동은 단조롭게 보였지만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고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가 남긴 한 마디가 오래 내 가슴에서 메아리쳤다. "내 철학은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자'입니다."

척박한 땅 아일랜드의 소박한 삶에서 흘러나온 그 말이 독일 마을 서점 주인 노인의 말과 오버랩 되었다. 가만히 질문을 던져본다. 에피쿠로스의 정원과 같은 곳에 들어가야만 사색적 삶을 살 수 있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누구든 생각을 바꾸고 자기 길을 찾는다면 자기 삶의 자리에서 그런 정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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