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악담과 추문에 주목하는 사회...미담이 그립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10-06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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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문과 악담 가득한 사회, 미담찾기가 필요
숨은 미담 주인공들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

2001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소개된 이야기다. 케이티(Katie)라는 소녀가 사는 집 옆에 다운증후군이 있는 지미(Jimmy)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지미는 태어날 때부터 말하는 것이 느리고 행동도 느리다. 소녀의 눈에 지미가 무언가 다르고 특이해 보인다. 딸이 이를 간파하고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걔 이상해, 뭐 잘못된 것 있어요?" 엄마는 지미도 똑같은 사람임을 가르치기 위해 딸을 데리고 그 집을 방문한다. 그렇게 케이티와 지미는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하고 대화한다. 이 첫 만남 이후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네가 수학을 배우는 것이 어렵듯이 지미는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배우는데 시간이 걸려. 좀 느리지만 너와 똑같고, 똑같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고, 똑같이 사랑스러워." 마침내 두 아이가 친해지고 어울려 노는 사이가 됐다.
이 이야기는 시청자들에게 적잖은 감동과 훈훈함을 안겨줬다. 

요즘 차별이나 혐오, 갑질 사건이 터지는 경우면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도 저런 미담이 필요하지 않을까? 보이지 않은 곳에서 지미의 엄마 못지않게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왜 소개되지 않는 걸까? 이런 이야기들을 발굴하려는 노력도 드물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매체 역시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 전반의 에너지 흐름이 거칠고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분단 체제와 거대 양당 구조로 인해 정치사회적으로 적대성과 대결의 문화가 팽배하다. 게다가 언론과 미디어들도 부정적인 사건·사고를 주로 클로즈업하고 자극적인 기사 쓰기에 주력한다. 포지티브보다 네거티브 정보가 득세하고 분노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영상과 이미지가 만연하다. 온갖 창작물들도 공포와 긴장감을 자아내고 상황 설정이 극단적일수록 잘 팔린다. 흉사와 악담과 추문들이 넘쳐난다. 우리들은 인간미와 순수함과 따스함에 오래 굶주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나의 아저씨'와 같은 소소하고 따스한 이야기가 담긴 드라마에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 조금만 눈을 돌리면 미담들 가득

시민사회 활동을 하는 한 여성이 자기 시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사회에 거지가 흔했던 시절, 시댁은 지방에서 제법 풍족한 집안이었다. 시어머니는 거지가 찾아오면 반드시 집안으로 모셔서 따뜻한 밥을 지어 한 상 대접했다고 한다. 심지어 문밖 멀리서 거지들이 오는 모습이 보이면 음식 장만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 집안 대대로 지켜온 전통이라는 말도 곁들였다. 그분도 이를 배워서 언제나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좋은 씨앗처럼 생명의 나눔을 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조상들과 부모 세대,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사회가 각박해지고 온갖 추문과 경악스런 일들만 연이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이야기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내가 직접 들은 미담 하나를 기억해 내자 아름다운 것들이 마구 보이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숱한 미담들이 내 주변에 가득하다. 내 지인들의 상당수가 여기저기서 자원봉사를 하고, 재능기부를 하고, 소액이나마 공익적 단체에 기부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들과 어울리거나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이들도 많다. 난민을 위해 법적인 지원과 공동체적인 지원을 하며 살아가는 변호사 부부도 기억났다. 학교밖 청소년들을 위해 마음 다해 수고하는 분들도 생각났다. 아시다시피 탐욕과 거짓으로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양심적이고 윤리적 선택을 하는 시민들이 훨씬 더 많다. 이들은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서 사진을 찍어대며 떠들썩하게 나팔을 부는 정치인들과 차원이 다르다. 기업 브랜드나 단체 이미지를 위해 과시적인 홍보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의 일부로, 일상의 행위로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견고히 지탱되고 있으며 여전히 살만 한 것이 아닐까.

◇ 우리는 매순간 환대의 부름 듣고 있어

엠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환대'(hospitality)를 철학의 핵심 주제로 사유한 현대의 철학자다. 그는 절대적 환대를 주창했다. 사실 우리들이 행하는 대부분의 환대 행위는 상대적이다. 나의 안전과 삶의 리듬과 존재의 기둥이 그대로 유지되는 범위 안에서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환대한다. 이와 달리 절대적 환대는 자신의 불편이나 손해가 예상되더라도 타자를 환대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든다.

폭설이 내리는 혹한의 밤에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린다. 주변에 다른 집들은 없다. 주인은 생각한다. 마구 문을 두드리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없고, 만일 그를 집 안에 들이면 자신과 가족을 모두 죽이거나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방문자는 추위에 얼어죽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레비나스는 말한다. 절대적 환대란 설사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예견된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문을 열고 그를 집안으로 들여 식탁을 나누고 돌보는 것이라고.

그가 말하는 절대적 환대는 다분히 이상적인 것이고, 환대 정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종교적 윤리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게다가 '내 집, 내 것, 주인'을 전제로 하는 한 절대적 환대가 진정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환대의 아포리아(aporia)가 내재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라는 개념은 '환대'를 둘러싼 우리의 망설임과 주저함, 우리의 소극적이고 적당한 환대를 깊이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는 레비나스가 그려내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의 상황은 거의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매순간 환대의 부름에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 한 사람을 돕는 일이 가장 보람돼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한 시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20년 전, 한국에서 지인 부부가 찾아왔다. 자기 집에서 묵으며 여기저기 구경을 하도록 도왔다. 일요일 아침, 그들은 당시 유명한 한 교회를 방문했다고 한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필름이 떨어졌다. 그래서 주차장을 지나가는 한 남성에게 "필름을 어디에서 구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근처에는 필름을 구입할 수 있는 가게가 없다"고 말하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승용차로 가서 카메라를 가져와 수많은 사진을 찍어주었다. 남다른 호의였다. 헤어질 때 그는 "집의 주소를 적어달라"고 요청했다. 저녁 시간, 그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준 그 남자가 찾아왔다. 사진을 현상해서 직접 전달하러 온 것이다. 시속 70마일로 1시간30분이 걸리는 먼 거리다. 질문을 했다. "우편으로 사진을 보내주면 되는데 왜 직접 왔나요?" "손님이 한국으로 돌아가기전에 주려고 직접 왔어요." 그 말을 듣고 그 시인은 뭉클했다고 한다.

그 남성의 친절은 결코 가벼운 친절이 아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절이다. 섬세하고도 타자 중심적이어서 가히 깊은 수준의 환대처럼 여겨진다. 환대 혹은 사회적 실천이란 무언가 거창한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의 삶 속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한 사람에게 진심을 담은 배려를 행하는 것이 가장 실제적일 환대일 것이다. '환대'란 자기 집의 문을 여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먼저다. 닫힌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내가 이 집의 주인이며 내 삶은 오로지 내 것이라는 상식조차 뛰어넘는 흥겨운 자유가 거기에 있다. 남을 돕는 자에게 주어지는 희열과 보람도 덤으로 얻게 된다. 과연 미담이야말로 좋은 에너지가 가득한 스토리다.

어디 미담이 없을까? 여기저기서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미담을 목격하는 것은 큰 행운이다. 우리 주변에서 미담들을 찾고 발굴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미담을 듣고 감동을 받는 데 머물지 않을 때 진짜 미담이 시작된다. 그것은 나 자신이 미담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는 일이다. 우리 각자의 삶의 이야기가 미담이 가득 담긴 소박한 책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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