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문학적 파묘 '토성의 고리'가 던지는 질문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3-26 08: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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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 속 한 장면

영화 <파묘>가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속 풍수와 굿판과 주술은 오컬트적 분위기를, 파묘를 통해 확인되는 학살의 흔적들은 우리의 역사적 기억을 묘하게 자극한다.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는 멜랑콜리한 여행기록의 방식으로 문학적 파묘의 서사를 담고 있다.

<토성의 고리> 속 화자는 자신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도보여행을 떠난다. 그는 영국 동남부해안을 가로지르며 여행을 시작한지 1년 후 온몸이 마비된 상태로 노리치의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입원하게 된 것은 "오랜 과거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괴의 흔적들을 보며 느낀 먹먹한 전율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회상한다. 그는 병원에서 소설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쓰기 시작하고 퇴원 후 흩어진 메모들을 정서하며 그 기억의 파장을 따라가며 글을 남긴다. 그의 신체가 접속하는 공간은 기억과 역사의 고리가 되어 엄청난 흡인력으로 그를 과거여행으로 끌고간다.

1. 전쟁, 기억 그리고 흔적들

그는 써머레이턴 성에 속하는 기차역에 내린다. 써머레이턴 대저택과 주위의 무성한 녹지와 숲을 구경하고 주목(朱木) 미로를 헤매기도 한다. 거기서 만난 써머레이턴 정원사 윌리엄 헤이즐은 2차 세계대전 때의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헤이즐은 연합군이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을 때마다 파괴된 도시들을 연필로 표시한 독일지형도를 보여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수 십 개의 독일 도시들을 알게 됐고, 결국 독일 전체를 암기하게 됐고, 그 나라는 자신의 머릿속에 낙인처럼 찍혔다'고 말한다. 아울러 써머레이턴 상공에서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이고 추락하는 모습도 봤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렇게 두 조종사이자 비행장교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 몸의 이런저런 잔해는 이곳 땅에 묻혔습니다."

헤이즐의 시선과 발화는 그간의 전쟁 영화나 소설에서 다루는 전쟁 묘사와는 크게 다르다. 선과 악의 도식이나 전쟁의 열기 혹은 광기는 절로 형애화되고 시공간적으로 거리를 둔 관찰자의 증언 방식으로 차갑게 서술된다. 그의 증언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독일의 도시들과 재가 되어 사라진 숱한 독일인들의 잔해, 산화한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의 죽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파묘적 기능을 하고 있다.

2. 청어잡이, 그 수난의 역사

소설 속 화자는 여정 중에 블라이드 강 철교와 기차들이 중국 황제에게 납품하는 물품과 밀접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둘러싼 중국 황제와 영국과 관련된 죽음 이야기와 장면들을 상세하게 들려준다 ; 난징을 사수하며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을 버텨내던 태평천국의 천황 홍수전의 최후의 자결과 수십 만명의 태평군들을 집단 자결 장면, 프랑스 신부 새들렌의 처형과 처형 이후의 심장에 대한 보복 처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방군/황제군을 통해 죽음/추방당한 600~1000만명의 사람들 이야기, 함풍제의 독극물 죽음과 끊없는 장례행렬, 가뭄으로 인해 죽은 수천만 중국 백성들, 광서제의 병사와 연이은 황태후의 발작사 등. 중국에서 일어난 이러한 죽음 서사와 죽음 현장들을 장황하고 정밀하게 말하는 제발트의 기획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보여행자는 로스토프트 남쪽 해변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하며 낚시하는 무리를 목격한다. 그에게 낚시꾼들은 그저 '그 자리를 지키며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뒤로 하고 앞에는 오로지 공허만 남아있는 장소에 머물고 싶은 따름일 것이다." 낚시꾼들은 민어, 가자미, 대구를 잡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잡히는 물고기의 3분의 1은 중금속에 오염돼 이상발육과 기형을 안고 태어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유럽의 청어잡이의 역사를 떠올린다.

유럽에서 청어는 일종의 국민 생선으로 그 어획량이 엄청나다. 근해에 수백만 마리의 청어떼가 몰려다닌다. 청어잡이 배들이 밤에 어망을 펼쳤다가 다시 건져올리면 갑판 위에는 죽은 청어들이 가득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밝고 하얀 것은 청어들의 피부와 그 위에 뿌려진 소금뿐'이었다. 어망에 갇힌 청어들은 약 8시간에 걸쳐 어망을 끌어올리고 감는 과정에서 질식하게 된다. 그래서 청어가 물에서 끌어올려질 때는 대부분 죽어있다. 화자는 이를 청어의 수난사라고 표현한다. 그의 마음은 청어의 슬픈 운명에 얽힌다.

"실은 우리는 청어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3. 토성의 고리, 떠도는 것들 

천체 사진을 보면 토성의 '고리'는 찬란하게 빛나고 기하학적 원환으로 질서정연해 보인다. 하지만 토성의 고리는 얼음 결정체와 달들의 잔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때는 위성 혹은 달이었던 것들이 부서진 채로 차가운 고체 덩어리가 되어 행성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인식세계에서 토성은 멜랑꼴리와 시간의 천체다. 제발트는 '토성'과 그 주위의 '고리'를 통해 나와 너와 인류, 소위 세계와 역사라는 문명의 비극적 현실과 운명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읽힌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푸른별 지구지만 마치 토성의 고리와 같은 멜랑꼴리한 죽음의 서사로 가득한 땅이다. 그 역사는 청어떼 잡이의 역사이며, 그 대지는 파괴의 잔해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 기억은 아직 파묘하지 않아 드러나지 않은 숱한 죽음들과 학살들이 고리를 이뤄 순환하고 있다. 여기 한반도 전역에도 토성의 고리가 떠돌고 있다. 저기 남도에서 압록강 두만강 넘어 만주벌판까지, 가까이는 우리가 사는 도시들과 마을들과 이름 모를 골짜기들에도.

놀랍게도 청어 이야기를 다루는 대목(76~77쪽, 창비 출판사)에 어느 숲 속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의 사진이 담겨있다. 이 사진을 통해 우리는 제발트가 청어잡이를 대학살 이미지와 연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진은 말한다. 청어떼를 기억하라, 시신들을 기억하라. 묻혀진 진실을 알라.

4. 미로 바깥으로

제발트는 미로를 경험하며 숨이 막힌다. 먼저 그는 써머레이턴 정원에서 주목(朱木) 미로를 경험했다. "나는 그 안에서 길을 완전히 잃은 나머지…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더니치의 들판에서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폐허를 지나 복잡한 숲속 길을 화살표를 따라 걸으며 오래 헤맨다. 그에게 이는 미로 경험 같았다. "마치 나를 위해 따로 만들어놓은 듯한 미로에서 다시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나아가 소설은 이 세계에 미로가 증식하고 있다고 암시한다. "뜰륀의 미로와 같은 구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소멸시키려는 중…, 아직 아무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뜰륀의 언어가 이미 학교에 침투중이고… 뜰륀의 역사로 덧칠되고 있으며…, 세계는 뜰륀이 될 것이다."

작가는 미로 체험이라는 장치를 통해 출구가 없어보이는 미로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미로에는 분명 출구가 있다. 하지만 미로 안에서는 출구를 발견하기 어렵고, 숱한 시행착오와 면밀한 시도 끝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 정원놀이 혹은 하나의 유희로서 미로는 경험해 봄직 하지만 만일 우리 삶이 미로이고, 세계가 출구없는 미로로 치닫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좀 높은 장소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써머레이턴의 주목 미로의 한 가운데처럼 작은 중국식 정자가 있었다."

미로 바깥, 특히 미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서는 미로 전체를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안식할만한 공간이 있고, 출구도 찾을 수 있다.

소설 속 여행자의 걸음은 파괴의 잔해를 찾아다니는 슬픈 여행이자 죽음의 흔적을 들춰내는 파묘 여정같아 보인다. 그 길은 미로 여행이기도 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토성의 힘은 모든 것들을 부수고 결빙시킨다. 그 고리는 폐허로 변해버린 과거의 영광들과 청어떼 사체들과 무의미한 미래의 약속들이라는 얼음조각들로 가득차 있다.

제발트는 침묵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토성의 고리에 갇혀 부서진 파편으로 떠돌 것인가? 그 힘을 벗어나 우뚝 서서 전체를 조망할 것인가? 냉정하게 성찰할 일이다. '나는 토성의 고리 안과 밖, 어디에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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