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나를 편들어주는 '한사람'만 있다면...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10-24 0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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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탓, 상황탓...피해자 의식 던져야 변화가 시작
공존하며 살아가는 기술 연마하면 자유로워져


우리나라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2012년 실시한 한국인 피로보고서 설문조사에서 '당신에게 피로감을 안겨다주는 피로 물질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42%가 '직장 상사와 동료'라고 답했다. 2위는 배우자(14%), 3위는 자녀(11%), 4위는 부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터와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사람들이 '피로 유발자'인 셈이다. 어디 다른 사람만 나에게 피로감을 주는가?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피로유발자일 수 있다. 설문에 응답한 직장인 자신도 다른 동료와 부하, 배우자, 자녀에게 그럴 수 있다.

가까이서 삶을 함께 하는 이들과 편안하고 충만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기쁨을 안겨주고 격려하며 기쁨과 슬픔조차 함께 나누는 인격적인 관계를 바라건만 갑질과 거친 말과 배려없는 이기적 행동으로 관계가 일그러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남탓, 사람탓만 하며 피해자 마인드를 가지는 태도는 협소한 관점일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피로감 근저에는 사회 전체의 문화적 성숙도, 경제적 기반, 직장 문화, 가부장제 질서, 불공정하고 일방적인 분배와 소통 방식 등의 구조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거시적인 정치의 변혁과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정치 참여가 절실하다. 아울러 내가 먼저 실천할 일이 있다. 피로사회 현상을 하나의 현실로 간주한다면 결국 일차적인 열쇠는 개인의 실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이 되는 피로 환경을 함께 극복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존의 기술

공존의 기술이란 함께 살아가는 지혜다. 인간 사회는 공존하는 지혜를 터득하며 발전해 왔다. 가장 최근의 인류학적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사랑하고 공존하도록 진화해 왔다고 한다. 초기 인류는 먹이사슬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고도화된 신체 감각, 날렵하게 질주하는 속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 바로 관계를 맺는 재능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거대한 신체와 큰 뇌를 가진 네안데르탈인보다 약한 종족이었지만 마침내 그들을 물리쳤다. 소통의 힘 덕분이었다. 신경과학자 스테파니 카치오프는 "네안데르탈인은 짐승같은 무적 용사였던 반면, 호모사피엔스는 사회적인 전사였다"고 말했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존하며, 단결된 사회적 힘으로 마침내 지구 최고의 포식자가 된 것이다.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먼저다. 약하고 보잘 것 없어서 나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재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존중하는 일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투명인간이나 잉여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타자의 철학'을 지녀야 한다. 아울러 불가피한 갈등과 이해관계 충돌이 있더라도 지혜롭게 조율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절대적인 원윈(win win)이란 결코 쉽지 않지만 최선의 길을 함께 찾아야 한다.

입으로는 공생과 상생을 말하면서 내 몫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해답이 없다. 최소한 타인의 희생과 고통 위에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착취적 관계는 한사코 극복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노동과 삶의 고통과 감정적 소외를 아랑곳 않고 기생하는 관계부터 깨뜨려야 공존의 서곡을 쓸 수 있다. 그런 불균등 관계는 결국 예기치 않은 적대적 투쟁과 파국적 종말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내가 먼저 공생과 상생의 가치를 고집할 때 공존의 길이 열린다. 함께 어울리고 만나고 일하는 것이 즐거울 뿐 아니라 그 몫을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함께 나누려는 노력을 쉬지 않을 때 공존이 지탱된다.

요즘 화제가 되는 기업 파타고니아(Patagonia)의 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준다. 등산장비 회사로 시작해서 유명 의류브랜드가 된 파타고니아는 설립자이자 소유자인 이본 쉬나드의 특이한 삶의 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본 쉬나드가 쓴 <파타고니아 :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여하한 기업을 불신하는 나로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역사로부터 어떠한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지금까지 나아왔는지를 담고 있다. 파타고니아는 특히 기후환경을 위해 실천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매출의 1%를 기후환경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순익의 1%가 아니라 전체 매출의 1%이다. 놀라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파타고니아의 경영철학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일은 늘 즐거워야 한다. 일터로 오는 길에는 신이 나서 한 겅중겅중 뛰어올라야 한다. 내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입고 심지어는 맨발로 일하는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유연한 근무로 파도가 좋을 때에는 서핑을 하고 함박눈이 내리면 스키를 타고 아이가 아플 때에는 집에 머물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권위가 아닌 신뢰로 운영하며 일과 놀이와 가족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야 한다."

◇ 공감하는 대화의 기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공감'이다. <당신이 옳다>의 저자 정혜신은 "공감은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옳든 그렇지 않든 일단 경청하고 '당신이 옳다'고 인정해주면 누구든 힘을 얻고 소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가로서 정혜신은 누군가 극단적인 말이나 생각·행동을 할 때에도 "나는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나를 편들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정혜신은 그 한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20년 전 가끔 만나서 대화하는 지인이 있었다. 그분은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맞장구를 치며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며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분과 대화하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이 내 얼굴이 환해졌다고 한다. "아빠는 그 선생님과 대화하고 오면 행복해 보여요." 그 말을 듣고보니 말수가 적은 내가 그분과의 대화를 무척 즐기고 대화 내내 신명이 넘쳤다는 것이 기억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분은 나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나의 말에 넘치는 공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디. '선생님처럼 말하시는 사람은 처음 봐요' '아주 신선한 생각이네요' '네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는 상담학을 공부한 분인데 상담사 수십 명을 이끄는 슈퍼바이저였다. 그분은 대화의 고수였다. 나는 그분과 대화하면서 내가 인정받는 느낌을 받았고, 무슨 말을 하든지 그가 내 말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믿음으로 말을 쏟아냈던 것이다.

◇ 내가 먼저 사랑하는 사랑의 기술

한 서구인이 친구집을 방문했다. 친구의 어린 딸이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대화를 걸었다.
"수잔,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은 어느 것이니?"
"여기 없어요."
"아, 어디에 있니? 좀 보여줄 수 있니?"
그러자 수잔은 대뜸 거절한다. "안돼요!"
"왜?"
"아저씨가 인형을 보면 날 비웃을 거예요."
"비웃지 않을 거야, 좀 보여줄래?"
수잔이 자기 방에 가서 인형을 가지고 왔는데 인형의 머리가 벗겨지고 옆구리가 터지고 다리 한 짝이 없는 망가진 인형이었다. 궁금해서 물었다.
"수잔, 왜 이 인형을 좋아하는 거니?"
"아저씨, 이 인형은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참으로 순수한 마음이다. 우리가 애초에 가졌던 이런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 아이의 말에는 놀라운 화두가 담겨있디.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껴안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이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기술'(art)이라고 강조한다. 기술(art)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기원하는 말로 물건을 제작하는 기술이나 방법론적 기교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차원을 다루는 기예(技藝) 혹은 생산적인 능숙함을 말한다. 프롬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사랑을 주는 '대상'에 초점을 두고 사랑이란 '받는 것'이라고 여긴다.

특히 사랑을 느낌 혹은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설레거나 가슴 뛰는 감정 그 자체를 그 사랑의 증거라고 간주한다. 프롬은 관계를 둘러싼 수많은 비극이 바로 이 오해에서 비롯한다고 분석한다. 아울러 그는 '사랑은 주는 행위'란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고, '집중'과 '인내심'과 '관심'이 요구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느낌의 사랑이나 짜릿한 사랑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로서의 의지적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성숙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4가지 메달이 있다고 한다. 우리 각자는 인생의 마지막에 이 중 하나의 메달을 받는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내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금메달이 주어진다. 은메달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에게 부여된다. 동메달은 사랑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몫이다.

마지막 하나의 메달이 있다. 이 메달은 사랑을 잊어버린 사람,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한 사람의 것이다. 그 메달을 목메달이라고 한다. 일종의 언어유희가 담긴 유머이기도 하지만 뜻이 깊다. 사랑은 우리 삶에서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며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죽음과 같다는 거다.

기술을 연습해 보자. 사랑의 기술, 공감의 기술, 공존의 기술을. 시대의 어둠은 짙어가고 여전히 온갖 난제와 불안이 잔인한 화살처럼 우리에게 날아들 것이다. 하지만 기술 연마를 통해 내공을 갖춘다면 더는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왜? 다른 이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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