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참는 것만이 미덕일까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12-16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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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통제는 공존 위해 터득한 문명의 지혜
정당한 분노는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젊었을 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상사와 일한 적이 있다. 무엇이 거슬렸는지 얼굴을 붉히다가 고함을 지르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그에게 충성하는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저 분은 뒤끝이 없어!" 상사가 화를 터뜨리는 것보다 선배의 그 말이 더 싫었다. '뒤끝이 없다'는 말은 상습적인 갑의 분노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명분일 뿐 아니라 분노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 분노를 통제하는 세상

분노는 사회적 금기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분노를 정죄한다.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이며 자기절제 능력도 없으며 에티켓도 모르는 사람으로 단정된다. 그만큼 분노가 타인이나 공동체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모든 잠언이나 처세술에서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며 자신을 위험으로 빠뜨린다고 경고한다. 아울러 분노를 다스리는 자는 영웅과 장수보다 위대하다고 칭송한다.

분노의 통제는 문명과 더불어 시작됐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분노는 봉합되지 않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진물같은 것이다. 이 진물은 자기애를 감싼다. 진물이 상처를 덮어 보호하는 딱지가 되는 것처럼,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분노를 통해 자기애를 지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분노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분노는 통제되어야 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 문명이 최초로 시작된 것은 화난 사람이 돌 대신에 단어를 던지면서부터이다." 항의와 욕설과 폭언과 짜증은 허용되지만 물리적 힘을 수반한 분노의 표출은 폭력이라는 범죄가 됐다. 그런 폭력적 분노는 야만적으로 간주되고 처벌된다.

영성의 영역에서는 분노를 더더욱 죄악시한다. 분노를 제어하는 기술은 모든 종교적 수련에서 빠지지 않는다. 기도를 통해 신에게 탄원을 하거나, 마음 수련을 해 분노를 사라지게 하는 기술을 가르친다. 베트남의 틱냑한은 화(anger)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마음속에 분노나 화가 일어날 때는 먼저 깊이 호흡을 하며 침묵하고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권한다.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으면 나가서 천천히 걸으면서 호흡하라고 한다. 걷기 명상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화는 자연히 누그러지고 우리의 마음은 평정과 고요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그 요체는 화가 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화를 억누르지 말고 엄마가 우는 아이를 보살피듯이 가만히 그 화를 보살피는 것이다. 실용적이고 감미로운 처방이 아닐 수 없다.

◇ 우리 안의 통제자

독일의 심리학자 안드레아스 크누프(Andreas Knuf)는 우리 머릿속에 쉽게 몰아내지 못하는 세 가지 목소리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내면의 작업 감독관의 목소리다. 이 감독관은 우리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든다. 일을 많이 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필요한 휴식을 스스로 가로막고 충분히 일하고서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둘째는 내면의 비판자 목소리다. 이 비평가는 최악의 완벽주의자로 행세하게 만든다. 완벽에 대한 강박이 실행력이나 노동의 성과를 떨어뜨리지만 이 비판자는 쉬지 않고 완벽을 강요한다. 내면의 비판자는 자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미심쩍어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셋째는 남의 비위를 맞추라는 을의 목소리다. 이 목소리는 언제나 친절하게 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남의 요구와 시선에 따라 움직이게 만든다.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의 평가에 휘둘린다. 아첨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노예가 되기도 하고 자발적 봉사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결국은 자기 착취적 경향을 익히게 된다. 온갖 고상한 가치와 이류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배려할 줄 모른다. 결국은 내면의 분노가 누적되고 굴종이 습관이 되게 한다.

그는 불안이나 의심, 불만 및 분노는 단지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기본 구조와 더 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고 시스템이 다른 사람이나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맞추도록 구성돼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속에서 떠들며 명령하는 목소리를 인지하고 그 머리를 조용히 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머리야 조용히 해'라고 말하고 그 말에 속지 않는 것이다.

◇ 제대로 분노하라

모든 분노를 단지 개인적인 '통제'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방법들은 결정적인 약점을 지닌다. 그것은 분노하는 자기 자신에게 모든 문제가 있으며 분노는 해소되어야 할 심리적 문제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분노의 해법이 개인의 자기 통제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으로 몰아간다. 그 분노를 일으킨 문제의 원인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거나 때로는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분노해야 마땅한 의분이나 정당한 분노도 있다.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약자들의 분노와 같은 집단적 분노의 경우 마음의 훈련으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다. 차별 구조와 갑을 관계를 바꾸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속이 상할 때 꾹 참고 자제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비극처럼 슬픈 일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자신을 물어뜯을 때 항의하고 싶지만 겉으로 미소 짓는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자기위로적 착각일지도 모른다. 당사자 앞에서는 입 다물고 있다가 화장실에 가서 펑펑 우는 것 역시 패배자의 자기 해소에 머무를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장 어리석다. 동거하는 가족이나 죄 없는 반려견에게 화를 쏟아내는 것도 집어치울 일이다. 먼저 분노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주눅들지 않는 것이 훨씬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상처를 최소화하고 관계를 새롭게 재편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 아니다.

당당하게 분노할 줄 아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자라는 증거다. 물론 분노를 거칠게 표현하거나 공격적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은 금물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패자가 된다. 차분하게 불쾌감을 표현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시정의 약속을 하라고 요구하는 내공이 요구된다. 언어폭력, 차별, 갑질, 모욕, 성희롱 등등의 상황에서 자기 결정의 힘을 지녀야 한다. '나의 신체와 삶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권을 지님을 알고 행동하는' 자기 결정의 태도 말이다.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언제나 사랑 받기만 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만을 바란다면 언제나 상처를 입고 삭이는 일만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당한 분노는 자기 배려일 뿐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성숙시킨다.

한때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분노하라>가 전 세계 지성계를 강타했다. 32쪽에 불과한 소책자이지만 출간 7개월 만에 200만 부를 돌파하며 프랑스 사회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책은 레지스탕스 정신을 잃어버린 프랑스 사회에 보내는 저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는 전후 프랑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레지스탕스 정신이 반세기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하고 프랑스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에 '분노하라'고 외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분노의 에토스를 주문한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양극화, 외국 이민자에 대한 차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정치에 저항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분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분노 이상의 차원이다.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고 구조적 불의를 시정하고 인권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감적 연대를 말한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유명한 기도문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초연함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과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참 고결하다. 이 문장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기도문이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소극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가 빠져있다는 점이 그의 한계일 것이다. 게다가 '나'의 자리에 '우리'라는 새로운 주어를 집어넣을 때 보다 나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이 기도문은 보편적이거나 이상적인 기도문이 아니다. 미국 중산층 지식인의 고뇌와 주저함이 담긴 수준이다. 기도만 할 일이 아니다.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 계쟁과 경합의 장에서 기꺼이 분노를 드러내고 다투어 공동체의 성장과 다원적 공존의 해법으로 이어지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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