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막연한 낙관주의는 오히려 독이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7-21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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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희망이나 희망 고문은 적절치 못해
고난 통과하는 자가 희망의 문을 열어젖혀


1973년, 미 육군 군의관이었던 쿠시너 소령은 헬리콥터 추락으로 베트콩에게 체포돼 5년간 수용소에 갇혔다. 열악한 환경에서 많은 포로들이 죽어나갔고 살아있는 이들도 무기력과 체념에 젖어있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눈빛이 번쩍번쩍 살아있는 한 포로가 있었다. 이름은 로버트(Robert). 그는 영양실조와 피부병에 걸려있었지만 심신은 건강했다. 쿠시너는 그에게 어떻게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물었다. 로버트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소령님 저는 살아서 나갈 것입니다."

근거를 알아봤더니, 베트콩이 품행이 바르고 협조적인 사람을 종종 하나씩 석방해주는데 자기에게 그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수용소 소장이 6개월 후에 로버트를 석방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그는 더 열심히 협조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역할을 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한 때가 됐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때부터 로버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곡기를 끊고 침대 구석에 쪼그려 누워서 입으로 손가락만 빨았다. 몸이 점점 굳기 시작하고 심신이 퇴행돼 대소변조차 받아내는 지경이 됐다. 11월 어느 날 아침 로버트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쿠시너 소령의 목격담은 전해들은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그 상태를 의욕상실이라고 진단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을 상실해버린 절망감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는 학습된 무기력을 극복하라고 강조한다.

◇ 막연한 낙관주의와 합리적 희망 사이

'희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와 합리적 판단이 배제된 막연한 희망은 최면제에 가깝다. 낙관의 태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하지만 막연한 낙관주의는 절망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스톡테일 역시 7년간 포로생활을 경험한 장교였다. 자신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대비한 그와 여러 동료들은 살아남았다. 반면 아무런 대비없이 그저 상황을 낙관만 하던 동료들은 어느 순간 닥쳐오는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과 관찰에 기초해 그는 합리적 희망, 합리적 낙관주의를 외쳤다. 합리적 낙관주의는 두 기둥을 지닌다. 그 하나는 비관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인식이다. 다른 하나는 잘 되리라는 굳센 신념으로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며 견뎌내는 것이다. 이는 막연한 낙관이나 허무맹랑한 희망과 크게 다르다. 냉철한 현실인식과 자기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막연한 낙관주의는 비현실적이다. 현실을 크게 왜곡한 꾸며낸 상상력이나 타인의 암시나 약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저당 잡히고 스스로를 기만(self-deception)하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자이자 의식연구자인 데이비드 호킨스는 <의식혁명>에서 무기력의 증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기력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와 연관이 깊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슬픔)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무기력은 희망이 없는 상태이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 데 없이 느껴진다."

오늘날 침대에 드러누워 손가락만 빨고 있는 로버트는 그리 많지 않다. 갑자기 생물학적 죽음에 이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용한 절망 가운데 너무 오래 머물러 마치 정신적 죽음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무기력과 절망의 그림자가 짙은 곳에서 허황된 희망을 설파하는 것은 그리 적절치 않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마약처럼 작동되기 때문이다. 때론 희망 고문이 되어 그·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희망을 가지라'는 막연한 말을 그치고 그 절망의 자리에 함께 머무는 것이 먼저다. 그들 속에 내재된 희망의 씨앗을 움찔 움직이는 것은 함께 공감하고 동행하는 현전의 토양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발견하는 자가 서사 만든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비교신화 학자로서 명성이 높다. 그는 기독교, 불교, 그리스로마, 길가메쉬 신화 등에 등장하는 신화적 영웅들과 상징들을 연구했다. 그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영웅의 삶의 여정을 그린 신화들을 깊이 다룬다. 영웅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narrative)가 있는데 그는 이를 원질신화(monomyth)라고 부른다. 캠벨에 의하면 영웅 서사들은 출발-귀환이라는 순환적 구조를 지니고 있고, 어느 시점에서 영웅을 미지의 세계로 떠나게 만드는 모험에의 부름이 있다. 그리고 온갖 장애물과 역경을 경험하고, 악마나 괴물 혹은 거대악과 맞서 싸워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와 많은 이들을 위해 봉사한다.

요약하면 세 단계다. 첫번째는 떠남이다. 초인적인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와 단절하는 것이다. 둘째는 고난과 극복이다. 연속적인 시도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실패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승리와 귀환이다. 마침내 자신을 극복하고 악의 세력을 제거하고 그것을 자신 안으로 내면화하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영웅의 여정은 마치 거대서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발견의 과정이자 내 안의 어두움을 발견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오늘날 영웅 서사는 다르게 전개된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 각자가 혹은 함께 그려갈 서사가 전개되고 있다. 이 스토리의 중심부에는 고난이라는 통과 의례가 있기 마련이다. 영웅이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자,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에 다름 아니다.

누에고치를 잘 알 것이다. 영상을 통해 보았듯이 누에고치에서 나비로 변신하는 과정은 실로 신비롭고 바라보는 우리에게 황홀감을 주기도 한다. 한 여성이 누에고치를 배양하며 관찰을 했다. 여러 마리의 누에고치가 나비로 탈바꿈을 하는 중이었다. 고치의 구멍은 좁은데 나비가 나오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가위로 그 구멍을 살짝 잘라주었다. 그 결과 나비가 힘들이지 않고 쑥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고생하며 나온 나비들은 벌써 푸드덕푸드덕 하늘을 잘 날고 있는데, 구멍을 넓게 열어주어 쉽게 나온 나비들은 몇 번 날개를 파르르 떨다가 땅바닥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때부터 이 여성은 열심히 고치의 변신에 대해 연구했다. 나비가 작은 구멍에서 힘쓰면서 나올 때 어깨에 쌓인 영양분이 온몸에 공급되고, 그 날개가 그 좁은 구멍의 측면에 마찰이 되면서 강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비의 날 수 있는 힘, 그것은 바로 변신의 과정에게 겪게 되는 고통스런 경험을 바탕으로 현행화된다는 것이다.

어릴 때 바느질로 수를 놓는 작업을 구경한 적이 있다. 천의 뒷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하고 온갖 실들이 무질서하게 얽혀있다. 하지만 수가 그려진 앞면에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고통을 부조리나 재앙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천의 뒷면만을 보는 것과도 같다. 앞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천의 뒷면이 있기에 앞면이 있다. 두 면을 고루 보는 것이 지혜다. 뒷면은 마치 소화되지 않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와도 같다. 예쁘지도 않고 맘에 들지도 않으며 오래오래 아니 영원한 숨기고 싶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의 뒷면에 새겨진 거칠고 아픈 흔적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성숙한 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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