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우리는 모두 '하인학교’에 있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4-08 10:45:29
  • -
  • +
  • 인쇄

우리는 지금 학교에서 수업중이다. 너도 나도 삶이라는 학교에서 인생 레슨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있을까?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하인학교'라는 특이한 장치와 은유를 통해 우리가 가야할 길과 이를 통해 배워야할 어떤 공부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작품 속 화자 야콥 폰 군텐은 가출해 하인학교에 입학한다. 부유한 주 의회 의원인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그가 자기 가문의 '그 콧대 높은 전통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세습되어 강요되어온 고상한 원칙들이 아니라 '삶이 자신을 교육' 시키기를 원해 밑바닥 삶의 여정으로 뛰어든 것이다. 야콥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내가 집을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소설에는 특이한 경로를 지닌 걸음 혹은 여행을 묘사하는 세 장면이 선명하게 등장한다. 셋 모두 상상이나 꿈과 밀접하다.

◇ 행진, 또 행진

야콥은 자신이 나폴레옹 휘하의 병사가 되어 러시아로 향해 가는 긴 행진 이야기를 나열한다. 자신이 병사가 된 것으로 가정하는 상상 속의 이야기다. 야콥과 병사들은 행진하며 나아간다. 결속력을 지닌 채, 전투를 생각하며, 가끔은 행진이 전투로 중단되기도 하지만 승리를 생각하며 '행군'을 지속한다. 두 페이지에 이르는 행군 이야기에 "우리는 행군해 나간다, 행군을 계속해 나간다"는 표현이 10번 이상 등장한다. 병사들은 황제의 얼굴을 보자 열광하고 환호한다. 행군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렇게 행군은 계속된다. 모스크바를 향해 … 대략 이것이 나폴레옹 지휘 하에 있던 어느 병사의 삶이다."

이 '어느 병사'의 삶이란 바로 야콥의 삶이자 모든 사람들의 운명으로 읽힌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점령지를 향해 나아가는, 빠져나올 수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지친 채로 행군하고 행군하는 병사는 '복종의 의무를 진 난쟁이'(71)이자 집단사고의 노예(75)이다. 그 복종과 끝없는 행군은 우리 연극의 도덕(127)이다.
 
◇ 천로역정 걷기

야콥이 한밤중 교실에 혼자 앉아있을 때, 선생인 벤야멘타 양이 나타나 손을 야콥의 어깨 위에 올려는다. 그녀는 야콥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인도하는데 이어서 몽환적인 경험들이 이어진다. 야콥은 문을 지나 황홀한 빛의 불 속으로 들어간다(입문 혹은 출발, 필자의 해석). 이어서 벤야멘타 양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지하실의 축축한 바닥에 입을 맟춘다(고난과 슬픔). 또한 벤야멘타 양의 말에 따라 '황량한 벽' 즉 성벽을 가슴으로 껴안는다(공허와 고독). 두 사람은 탁 트인 얼음이나 유리로 닦은 듯한 길 위에서 춤을 추며 스케이팅을 한다(자유). 이어서 아주 작은 휴식의 방 들어가서 담배를 피며 휴식을 한다(안식). 마침내 야콥은 의혹의 강에 이른다. 야콥은 헤엄치기 시작한다(의혹에서 벗어남).

야콥에게 이 경험은 현실이기도 하고 상상이기도 하다.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연상시키는 우화적 상징들을 담고 있고, 엄격한 선생이었던 벤야멘타 양은 마치 천사와 같은 안내자 역할을 한다. 이 길에는 장애물이 많지만 지나가야 할 통로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과 슬픔과 동요만이 아니라 경이로운 희열을 경험하기도 하다. 새롭게 펼쳐지는 상황을 마주할 때 오로지 이를 포옹하듯 직면하고 경험하는 방식으로만 통과할 수 있다. 야콥의 열망과 삶의 여정을 가리키는 이 서사는 야콥의 가는 길에 놓여있는 장애물들과 숙제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의 걸음이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초원과 사막의 여정

소설 말미에서 원장 벤야멘타 씨는 야콥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 너는 내 훈련생이 아니다."

"넌 이제 완전히 자유다" 

벤야멘타 씨는 처음에는 야콥을 엄격하게 대했지만 스스로 하인학교를 찾아온 야콥과 온갖 힘겨루기를 하면서 활기를 얻게 된다. 마침내 그는 도피적 선택으로 열었던 기숙학교의 문을 닫고 새로운 여정을 출발하기로 한다.

야콥은 벤야멘타와 함께 초원과 사막을 거니는 꿈을 꾼다. 이 꿈을 꾸고 벤야멘타 씨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난다. 알지도 못하고 경험해 보지 않은 길로 떠나며 야콥은 이렇게 열망한다.

"생각하는 삶일랑 이제 집어치운다. 나는 벤야멘타 씨와 함께 사막으로 간다. 보고 싶다. 황야에도 삶이라는 것이 있는지 보고 싶다."

그들은 거기서 자유롭고 힘겨운 여행을 하며 새로운 풍경을 보고 유목민들의 삶과 축제에도 함께 할 것이다. 그곳은 광야와 사막이라는 또다른 학교다. 이 스쿨은 좁은공간에 갇힌 학교가 아니라 펼쳐진 공간에 넘실대는 열린 학교다. 그곳에서는 규율이나 훈련을 강요하고 책과 매뉴얼 따위를 달달 암기하고 반복하는 딱딱한 교육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터득하는 배움이 진행된다. 이 학교는 삶의 '격동적인 움직임'(184)으로 일렁거린다. 노마드의 삶, 그것을 꿈꾸는 것이다. 언젠가 야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험들만을 존중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몇몇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가는 길이 스스로 선택한 길인가를, 지금 나는 어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냐고 묻는다. 야콥의 배움의 여정이 가리키듯 '하인학교'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 거기서 여러 동료들이나 안내자 혹은 구루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야 한다. 이 떠남은 하인학교를 졸업하고 하인으로 고용되는 길이 아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야콥의 형 요한은 동생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대중, 그것은 현대판 노예다"

우리는 예외없이 하인학교를 경험한다. 아니 세상 전체가 하인학교다. 많은 이들이 하인학교에 내던져져 거기 갇혀 있다. 잘난 사람들은 이 학교를 떠나 그럴 듯한 자리에서 하인 생활을 잘하고 있다. 우리가 이 학교에서 더 배울 것이 있을까? 다른 학교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쉽게도 실존주의적 냄새를 풍기는 소설에는 언제나 짙은 허무가 배여 있다. 삶의 부조리를 들춰내고 개인의 자유와 주체의 선택을 강조하고 다른 길을 암시하는 정도에서 멈추어 버린다. 그게 문학의 특성이자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탈출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 탈주도 가능하다.

하인학교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들도 있다. 나의 길을 찾고 내 길을 걸으며 내가 거쳐야 할 학교들을 만나는 일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사막 여행이 곧 유목의 삶은 아니다. 유목은 함께 살며 이동하는 삶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야콥들이 가야할 길은 미지의 광야로 떠나는 고독한 여정이나 감상적인 유목에 머무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광야의 학교는 유목 공동체의 길, 제국의 질서를 부수고 흔드는 유목전사의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자발적 탄소시장' 보조수단?..."내년에 주요수단으로 부상"

2026년을 기점으로 '자발적 탄소시장(VCM)'이 거래량 중심에서 신뢰와 품질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다.26일(현지시간) 탄소시장 전문매체 카본

두나무, 올해 ESG 캠페인으로 탄소배출 2톤 줄였다

디지털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가 올 한해 임직원들이 펼친 ESG 활동으로 약 2톤의 탄소배출을 저감했다고 30일 밝혔다. 두나무 임직원들

올해 국내 발행된 녹색채권 42조원 웃돌듯...역대 최대규모

국내에서 올해 발행된 녹색채권 규모는 약 42조원으로 추산된다.30일 환경책임투자 종합플랫폼에 따르면 2025년 10월말 기준 국내 녹색채권 누적 발행액

"속도가 성패 좌우"...내년 기후에너지 시장 '관전포인트'

글로벌 기후리더쉽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기후정책에 성공하려면 속도감있게 재생에너지로 전력시장이 재편되는 것과 동시에 산업전환을

"5만원 보상? 5000원짜리 마케팅"...쿠팡 보상안에 '부글부글'

쿠팡의 보상안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5만원을 보상하는 것처럼 발표했지만 사실상 5000원짜리 상품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팡한 사람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3년 더'...최종후보로 '낙점'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현 회장이 차기회장 최종후보로 추천됨에 따라, 앞으로 3년 더 우리금융을 이끌게 됐다.우리금융지주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차

기후/환경

+

내년 1분기부터 '소비기한 임박식품' 할인판매...'탄소포인트' 지급

내년 1분기부터 소비기한이 임박한 식품을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등 배달플랫폼을 통해 할인 구매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기후에너지환경부는 한국환

내년부터 아파트 준공전 '층간소음' 검사 강화된다

이웃간 칼부림까지 유발하는 층간소음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아파트 시공 후 층간소음 차단검사를 기존 2%에서 5% 이상으로 확대한다. 또 공동주택 위

배출량 28% '탄소가격제' 영향...각국 정부 탄소수입금 늘어

배출권거래제와 탄소세 등 '탄소가격제'에 영향을 받는 전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이 약 28%로 확대되면서 각국 정부의 탄소수익금도 늘어나는 추세다.26

'자발적 탄소시장' 보조수단?..."내년에 주요수단으로 부상"

2026년을 기점으로 '자발적 탄소시장(VCM)'이 거래량 중심에서 신뢰와 품질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다.26일(현지시간) 탄소시장 전문매체 카본

대만 7.0 강진 이어 페루 6.2 지진...'불의 고리' 또다시 '흔들'

환태평양 지진대 '불의 고리'에서 이틀 연속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 27일 대만 이란현 동쪽 해역에서 규모 7.0 강진이 발생한데 이어, 28일 페루 침

[날씨] 하루새 기온 '뚝'...다시 몰려온 '한파'

한파가 물려온 탓에 한반도가 다시 얼어붙었다. 이번 추위는 2026년 새해까지 이어질 전망이다.30일부터 북서쪽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는 찬 공기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