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숙의 토닥토닥] 나의 어린 왕자

김향숙 작가, 교육자, 前 혁신학교 교장 / 기사승인 : 2024-11-27 0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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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이는 등굣길이 즐거운 아이다. 늘 엄마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교문까지 와서도 모자(母子)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때마다 아이 얼굴에는 염화미소가 가득하다.

"엄마, 잘 가, 차 조심해야 해."

엄마와 작별한 아이가 교문에 들어선다. '타닥타닥' 발끝에 묻은 아쉬움이 제법 크게 들린다.

"반가워요, 어서 오세요."

나의 아침 인사에 아이는 반응이 없다. 오히려 엄마 생각을 방해하는 내가 성가시다는 듯 무심히 지나간다. 나는 아이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며 제법 친해졌는데, 성현의 관심 스위치는 아직 켜지 못했다.

# 교문 보행로 가장자리에 꽃을 심었다. 나는 아이들 칭찬을 기대하며 꽃 가까이에 서 있었다. 성현이는 여느 날처럼 가장자리 쪽에서 걸어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여기에 꽃을 심었죠? 이 꽃 때문에 반짝거리는 길로 못 다니게 되었잖아요."라고 귓속말로 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꽃모종이 대리석 블록에 걸쳐져 있었다.

"블록에 내 얼굴이 비쳐서 좋았는데." 성현이가 입을 비쭉거렸다.
"꽃길을 걸으면 기분이 좋지 않니?"
"꽃은 꽃밭에 심어야죠. 여기는 우리가 다니는 길이잖아요."

아이는 주저함이 없었다.

"너희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나는 성현에게 환영받지 못한 꽃이 안쓰러웠고, 아이들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가 다니는 길을 어른들이 맘대로 할 수는 없죠."

아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온몸을 콕콕 찔렀다. 자신의 길을 침범당한 아이가 학교는 누구를 위한 공간이냐고 따지는 듯했다. 문득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생각났다. 성현이는 비행사가 그려준 양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짜증부리는 어린 왕자같다. 나는 소행성에 있는 '철옹성 같은 가치관에 갇힌 어른들'이 된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행사는 빈 상자를 그려주며 어린 왕자를 만족시켰는데, 나는 성현이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성현이를 '나의 어린 왕자'라고 생각했다.

#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현이는 교문에 서있는 나를 가끔 쳐다본다. 내가 다른 아이들과 하이파이브 하는 것을 보면 빙긋 웃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성현이가 뛰어서 등교한다. 늦잠을 잤던 모양이다. 아이가 지나간 후였다. 누가 내 등을 노크하듯 톡톡 건드렸다. 돌아보니 성현이가 나에게 귀를 좀 빌려달라고 한다.

"우리 선생님, 칭찬 좀 해 주세요."
"내가?"
"그럼요, 우리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그래요."

아이는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착한지 설명하느라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했다. 눈가를 찌푸리며 손을 머리에 뗐다 붙였다 하더니 말문이 막힌 듯 말했다. "꼭 그래 주실 거죠?"

나는 왜 아이의 부탁이 의무감처럼 느껴졌을까. 성현이는 마치 선생님의 선행을 알리기 위해 천리만리 길을 달려와 숨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잘 설명해보려 할수록 서툴게만 보였던 아이의 진정성 때문이었을까. '진심으로 존중받아본 아이의 기쁨' 그것을 알리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었다. 성현에게 숨겨진 보물을 보는 듯했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길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의 어린 왕자를 볼 때마다 또 어떤 보물 보따리를 펼칠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 5학년 된 성현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적극성이 놀랍고도 반가웠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는 왜 나에게 '안녕?'이라고만 인사하는지 모르겠어요."
"오, 그래? 그럼 어떻게 인사해주면 좋겠어?"
"안녕, 성현아!라고 하든지, 암튼 좀 더 길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친구 관계를 고민할 시기를 맞은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내게 왔나 보다. 친구 보는 눈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성현인 자꾸만 발을 앞뒤로 기우뚱거리면서 제자리에서 맴돈다.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다. 손으로 몇 번이나 의자를 긁적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건 어려운 부탁인데요, 그 친구랑 내년에 같은 반이 되면 좋겠는데, 그건 어렵죠?"

상상 밖이었다.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친구와 같은 반이 되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거야." 성현이는 어색한 분위기를 마무리하는 재치도 있었다.

"그냥, 친구에게 그 말은 좀 해주세요. 나에게 인사말 길게 하는 거요."
"그럼 저 가볼게요."

# 친구 관계를 처음 경험하는 아이가 참으로 진지해 보였다. 친구에게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지 짐작이 간다. 얼굴을 붉히며 친구 곁을 몇 번이나 어슬렁거렸을 것이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엉뚱한 말만 던지고 왔는지도 모른다. 친구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을 것이다. 친구에게 정성을 들이는 아이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으려 애쓰는 나의 어린 왕자가 대견하기 그지없다.

# 어른들은 종종 아이의 행동을 보고 엉뚱하다고 말한다. 성장 과정에서 오는 자연스러움인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 어린 시절을 잊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른들이 하는 핀잔은 아이들의 생각을 가두게 한다. 그럴 때 아이들은 앵무새가 된다. 내가 만난 성현인 어른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아이다. 하치만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 아이의 목소리에는 어른들의 모순이 보인다. 내가 성현에게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나의 어린 왕자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지금쯤 '나의 어린 왕자'는 어떻게 길들어졌을까. 아니, 그 아이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길들이고 있겠지. 느릿느릿, 진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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