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칼럼] '한 땀 한 땀' 경이로운 작품들 앞에서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6-03-04 08: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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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쉼없는 작업이 작품 숭고하게 만들어
내 삶을 작품이 되게 하는 열정과 견딤이 필요
▲관람객들이 이상미 작가의 설치 작품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황산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울컥했다.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눈물이 솟구칠 것을 예감했다. 실로 벽에서 바닥까지 이어진 붉은 열정의 이미지를 조성한 그 작품은 예닐곱 평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1000호 사이즈가 족히 넘어 보였다.

작가의 손가락이 보였다. 실 한 올 한 올 자르고 잇는 손길, 바늘 한 땀 한 땀을 누르는 멍든 손끝이 느껴졌다. 섬유로 그리는 작가 이상미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동하는 손, 특히 실로 그리는 자수는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 땀 한 땀으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내 손은 노동하는 손이 된다."

◇ '한 땀 한 땀' 그리는 자수

알다시피 실로 그리는 자수는 동일한 동작을 끊임없는 반복하는 고된 작업이고 작업시간도 오래 걸린다. 미싱 기계로 후다닥 박지 않는 이상 한 번에 한 땀씩만 가능하다. 그래서 느리다. 작가의 손가락은 늘 아프다. 관람하는 내 손가락도 아팠다.

니체는 예술이란 수공업적인 과정을 통해, 장인의 정신을 가지고 반복적인 숙련으로 생성되어 마침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에게 필요한 유일한 자질은 근면이라고 말했었지.

작품 하나를 생성하기 위해 숱한 시간의 낮과 밤을 보낸 작가의 시린 몸이 보였다.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 아닐 수 없다. 페인트 붓으로 휘익 칠하거나 넓은 천으로 단숨에 덮어버리면 될 것을! '열정, 광기, 칩거, 고집, 반복'과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아마 그런 고집스런 어리석음에서 작품다운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리라.

◇ 작품을 걸치고 사진촬영까지?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방문객들이 거의 예외없이 그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며 즐겼다. 바닥에 있는 실로 된 천을 몸에 걸치거나 두르고 촬영하기도 했다. 천은 어깨를 두르는 숄(shawl)이 되고 펼쳐진 붉은 날개가 되기도 했다. 더러는 망토나 판초처럼 온몸을 감싸기도 했다. 사롱(sarong)처럼 허리에 두르고 이색적인 패션 소품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알고보니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살짝 권하고 있었다. 천조각을 마음껏 몸에 두르고 사진촬영을 해도 되노라고. 난 알아챘다. 아, 관람객들을 작품 속에 참여시키고 있구나! 천을 몸에 두른 관람객들은 작품의 일부가 되고 있었고, 작품을 물씬 향유할 뿐 아니라 그 작품을 재창조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있었다. 현대 예술 큐레이션의 가장 전복적인 콘셉트는 관람객이 단지 전시된 작품을 감상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작품을 직접 체험하고 작품 창조에 참여하는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전시실에서 한 재즈 연주자 커플을 만나 어울렸다. 남성은 1세대 재즈 가수이니 연세가 80세는 넘었을 것이다. 우리는 말했다. '이상미 작가의 작품은 마치 재즈 같다. 정해진 틀이나 공식을 벗어나려는 정신이 물씬 보인다'고. 

종로인문학당 맴버들 17인이 함께 방문했다. 예술감상 기획이벤트로 모였다. 우리는 작가와 오래 대화했다. 맨바닥에 앉아 격식 없이 대화했다. 우리는 각자의 소감을 이야기하고, 작가에게 질문도 했다. 작가가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여러분의 느낌과 생각을 많이 듣고 싶어요. 저는 제가 무언가를 말하기보다. 여러분이 느끼시는 것들을 통해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인사아트센터 경남갤러리 공간은 수십 개의 실로 그린 섬유작품과 실로 늘어뜨리고 펼쳐 조성한 조형작품 춤추고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 마음과 신체도 함께 춤추었다. 여느 전시회와 다른 이 분위기의 비밀이 무얼까? 그것은 관람객이 작품에 직접 참여하도록 열어둔 공간 기획과 작품 큐레이션 때문이었다. 아마도 작가는 전시 현장을 관람객과 어울려 노는 놀이공간이자 함께 연출하는 무대로 꾸몄으리라. 그런데 내 손가락이 왜 자꾸 부끄럽고 아플까?

▲섬유와 철사 등의 선으로 조형한 이상미 작가의 작품들 ©황산


◇손가락 하나로 자판을 두드려 쓴 작품

얼마 전 하남에 사는 박신구 작가 집을 방문했다. 그가 책을 출판하여 축하하러 들렀다. 경건하게 책을 받아 들고 펼쳤다. 숭고한 책이기 때문이다. 박신구 작가는 근육병 장애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병하여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고, 휠체어 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누워서만 지낸다. 두 발은 비틀어지고 두 손과 손가락도 마비되어 오른손 검지 끝만 겨우 움직일 수 있다.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전혀 없다. 두뇌와 영혼만 살아있다. 알다시피 근육병 환자의 보통 수명이 보통 25세~30세다. 그런데 박신구 작가는 48세다. 세계 최장수이고 기네스북에 등재만 하면 기록이 된다고 한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손가락 하나로 자판을 두들긴다. 그 작은 동작조차 무척 힘겹다. 하나에 하나의 자음이나 모음만 누를 수 있다. 아주 짧은 글 한 편을 쓰려면 온 종일 자판을 눌러야 한다. 두 손으로 피아노 치듯 자판을 두들기는 내 작업에 비해 수십 수백 배 느릴 것이다. 글을 쓰는 박 작가의 몸부림과 고투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참 수고하셨다.

시인 안도현의 싯구가 생각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는 과연 뜨겁게 살아본 적이 있는가? 지금 뜨겁게 살고 있는가? 그 누군가에게, 그 어떤 일과 작업에, 자기 삶에 과연 뜨거운 사람인가? 이 땅의 모든 작가들과 노동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뜨겁게 사는 당신에게 허리를 굽힌다. 내 손가락이 아프다. 내 손가락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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