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르포] 거리의 사람들..."온종일 말 한마디 안할때도 많아"

이재은 기자 / 기사승인 : 2021-05-18 19:45:30
  • -
  • +
  • 인쇄
[서울역 광장 노숙인들을 만나다]

새해 들어 담배와 위스키 가격에 집세마저 오르지만 '미소'의 가사 도우미 일당은 그대로다. 미소는 지출을 줄여보려 가계부를 정리하는데, 정작 줄을 그어 지운 목록은 다름 아닌 '월세'. 미소는 그길로 옷가지와 여행 가방만 챙겨 나와 한겨울에 길거리에 나앉고선 '미소(微小) 서식지'를 꾸린다.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미소. 바로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의 이야기다.

예년같았으면 설연휴를 앞두고 귀성객들로 북적거렸을 서울역.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귀성객 발길은 뜸했다. 대신 담배 한 개비와 술 한 잔만 있으면 하루를 만족하며 살아가는 '미소' 같은 사람들이 그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노숙인들이다. 겹겹이 두른 골판지에 몸을 의지한 채 추위와 싸우고 코로나를 경계하면서 거리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명절을 앞두고 서울역 주변을 안식처 삼아 사는 그들을 찾아갔을 때 마침 점심 도시락을 배식중이었다. 서울역 인근 배식소 '따스한 채움터'에서 도시락 하나를 챙긴 노숙인은 개미굴처럼 복잡한 지하도를 지나 빌딩 숲 뒤편의 무거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쫓아 거미줄처럼 늘어진 배전선로를 뒤로한 채 으슥한 골목을 걷다 보니, 탁 트인 언덕배기가 나왔다. 그곳 담벼락 주위에 노숙인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남대문로5가에 위치한 쪽방촌이었다.

▲남대문로5가 쪽방촌 골목길


이 쪽방촌은 노숙인들의 '만남의 광장'이다. 쪽방촌에서 살다가 더는 방세를 감당하기 버거운 사람들은 서울역 거리에서 잠을 청한다. 또 서울역에서 노숙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해 여윳돈이 생기면 다시 쪽방촌으로 돌아온다.

노숙인들 대부분 연고 없이 홀로 지낸다. 그래서일까.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일 이 '만남의 광장'에 모인다고 했다. 쪽방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있는 것보다 함께 모여앉아 술과 먹을거리를 나눠 먹으면 그나마 덜 외롭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명절이라고 다르지 않다. 최근 서울역 노숙자쉼터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뒤부터 감염 걱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민센터에서 배부받는 마스크 그리고 매주 검진을 받고 있으니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들이다.

노숙인 한 명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불쑥 귤을 내밀며 "이곳에 사는 사람은 365일이 다 명절이야"라고 말했다. 평일이나 명절이나 이들에게 같은 나날의 연속인 셈이다.

옆에 있던 다른 노숙인이 툭 끼어들며 이번엔 마스크를 건네줬다. "가끔 술 마시고 주정 부리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화기애애하고 분위기가 좋은 편이지"라는 말과 함께.

하루종일 말 한마디도 안 할 때가 많다는 노숙인들에겐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는 기자가 반가운지 쉼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떤 사람은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울기도 해"라며 주변 노숙인들의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서울역 3번 출구 옆 지하도에 자리를 잡은 한 노숙인이 입에 담배를 꽂으며 "이병철이나 정주영이나 우리나 다 똑같아, 인생사는 게. 사는 과정이 고달플 뿐이지. 돈 벌 걱정 다 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런 데에선 자유로울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는 10년전 사업에 실패하면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연명하다 몸이 버티지 못해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고시원을 전전하다 어느날 서울의 아파트 평균가격이 8억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집마련에 대한 꿈을 완전히 포기했단다.

"외로움이 제일 큰 병이잖아. 혼자 하루종일 말 안할 때도 있어. 그럴 때는 머리가 삥 돈다고. 그런데 서로 어울려서 막걸리 한 잔 씩 먹고 뭐 이러다 보면은 이제 서로 간에 위로를 삼는 거지."

그는 지척에 따뜻한 노숙자쉼터가 있지만 가지 않는다고 했다. 쉼터는 술을 마시면 출입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목으로 털어넘기는 건 술이 아니라 외로움인데 말이다. 그는 술 말고 외로움을 달랠 방법은 책 읽기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요새 다른 것보다도 공공도서관이 닫힌 게 제일 큰 아쉬움이다.

그가 안주 삼아 먹던 알밤을 건넸다. 젊은이들이 요새 고생이 많다며 되레 걱정이다. 선물로 받은 마스크 봉지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부스럭거렸다. 콧날이 시큰했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개인정보 유출' 쿠팡 수천억 과징금 맞나...SKT 사례보니

쿠팡이 3370만건에 달하는 개인정보가 무단으로 노출되는 사고로 수천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게 생겼다.2023년 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법 위

빙그레 '처음 듣는 광복' 2025 대한민국 광고대상 5관왕

빙그레가 지난 8월 전개한 '처음 듣는 광복' 캠페인이 '2025 대한민국 광고대상'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고 1일 밝혔다.대한민국 광고대상은 한국광고총연

탈퇴고객 정보도 유출?...불안에 떨고있는 쿠팡 3370만명 소비자

쿠팡이 실제 거래를 하고 있는 2400여만명의 활성고객보다 더 많은 3370만명의 고객정보가 무단으로 노출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쿠팡에 회원가입한

쿠팡 '3370명' 개인정보 털렸는데...5개월간 몰랐다

쿠팡에서 3370만명에 달하는 고객정보가 모두 털렸다. 이는 쿠팡의 구매이력이 있는 활성고객 2470만명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여서, 사실상 쿠팡에 가입

셀트리온제약 임직원, 청주 미호강서 플로깅 캠페인 진행

셀트리온제약은 28일 충북 청주 미호강에서 플로깅(Plogging) 캠페인 '셀로킹 데이(CELLogging Day)'를 진행했다고 밝혔다.플로깅은 '이삭을 줍다' 뜻의 스웨덴

현대이지웰, 멸종위기 '황새' 서식지 조성활동 진행

현대백화점그룹 계열 토탈복지솔루션기업 현대이지웰은 지난 26일 충청북도 청주시 문의면 일대에서 황새 서식지 보전을 위한 무논 조성 활동을 전개

기후/환경

+

'나노플라스틱' 무섭네...피부 뚫고 전신으로 퍼진다

나노플라스틱이 피부를 뚫고 몸속에서 퍼질 수 있다는 섬뜩한 연구결과가 나왔다.한국원자력의학원 김진수 박사 연구팀은 쥐 실험을 통해 나노플라스

강풍에 산불 1시간만에 '진화'...초기대응 전광석화처럼 빨라졌다

현재 건조한 날씨에 강풍까지 불어 산불이 확산될 위험이 큰 환경인데도 산불이 발생하는 즉시 발빠르게 진화하고 있어 대형산불로 번지지 않고 있다.

美 중서부 겨울폭풍에 '올스톱'...5300만명 발묶여

미국 중서부 지역이 추수감사절을 맞은 연휴에 난데없는 겨울폭풍으로 몸살을 앓았다.30일(현지시간)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 주말에 미국 중서

강풍에 날아온 지붕에 차량 6대 '우지끈'...동해안 피해 속출

강원 동해안에 강풍이 불어 자동차와 지붕이 부서지고 나무와 가로등이 쓰러지는 등의 피해가 속출했다.1일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이날

EU, 해저까지 쓰레기 관리…1000㎡당 1개 이하로 규제

유럽연합(EU)이 해안뿐 아니라 해저까지 쓰레기를 관리하는 지침을 마련했다. 해양오염을 그만큼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는 취지다.28일(현지시간) 유럽매

깐깐해진 호주 '환경법'…대형 자원프로젝트 '배출공개' 의무화

호주가 25년만에 환경법을 전면 개정해 대형 개발사업의 온실가스 배출 공개를 의무화했다.29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호주 의회는 '환경보호&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