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가족 울타리'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흔들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5-07 08: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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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를 사소하게 그려내는 맛이 담백하고 짜릿하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결코 소소하지 않은 이야기를, 어쩌면 엄청난 사건과 비밀이 담겨 있는 테마를 아주 고요하게 다룬다. 한 예술가는 이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의 위대함은 거창한 이야기를 아주 조용하게 들려주고 있다는 데 있어요.'

◇ 이 사람 펄롱은,

"언제나 쉼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또다시 다음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소설 속 주인공 펄롱은 소소한 사람이다. 펄롱의 루틴은 기계적이고 쉴 틈없이 바쁘다. 그는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을 위해 석탄과 땔감을 판매하고 배달하는 일로 새벽부터 분주하다. 캄캄할 때 일어나 작업장으로 출근해서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온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펄롱Furlong의 이름 뜻은 '고랑 길이'(furrow length)다. 쟁기에 묶인 소들(oxen)이 쉬지 않고 쟁기질 할 수 있는 8분의 1마일의 거리를 의미한다. 쟁기질에는 거세한 수소(ox)가 동원된다. 머슴용 이름이란 느낌조차 든다. 농사용 수소의 운명이 담긴 그 이름은 그의 태생과 고역으로 채워진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근면하고 무뚝뚝한 캐릭터의 그는 종일 등짐 가득 지고 낙타처럼 일한다. 어디 펄롱이 아일랜드에만 있는가? 그는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자영업자나 직장인 및 노동자들 역시 펄롱처럼 살아간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일과에 급급하고 자신이 진정 살고 싶은 삶이나 메타적이거나 윤리적인 생각거리 따윈 꼭 접어둔다. 펄롱은 우리다. 그의 라이프 스타일은 우리의 일상과 같은 리듬이고, 그의 생각은 우리 속에 스며든 시대정신이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 작고 고요한, 결코 영웅적이지 않은.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이렇게 아일린은 남편에게 예민하게 자기 견해를 말한다. 그날 석탄 배달일로 수녀원을 방문한 펄롱은 경당에서 바닥을 닦으며 광을 내고 있는 초라한 아이들의 노동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들을 데리고 나가달라는 아이들의 간청을 외면하고 찜찜한 기분으로 수녀원을 나온다. 하지만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하던' 아이들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린다. 더구나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있다는 사실과 담벼락마다 깨진 유리조각이 촘촘히 박혀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잠시 석탄 대금을 지불하는 짧은 시간에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마음에 걸리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내가 냉정하고 단호하게 반응한 것이다. 소설은 아내의 태도에 대해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아니 살아남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주간의 일요일 새벽 펄롱이 석탄배달을 위해 수녀원 석탄창고 문을 열자 그 속에 갇혀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그는 잠시 마음의 갈등을 겪다가 이번에는 수녀원의 초인종을 누르고 수녀원장을 만난다. "여기 석탄광에 밤새 갇혀 있었어요." 대화는 아주 긴장되게 전개된다. 하지만 펄롱은 홀로 수녀원을 나와야 했다. 몇 푼 담겨있는 크리스마스 봉투를 받아들고.

그의 내면의 도덕적 섬유는 질기고 팽팽했다. 크리스마스이브, 그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집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수녀원으로 들어가 꽁꽁 언 자물쇠를 풀고 창고 문을 연다. 그는 거기 갇혀있는 '세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걸어간다. 골목길이나 숲길이 아니라 보란 듯이 큰 길로 걷는다. 처음에는 세라를 품에 안고, 이어서 손을 잡고.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이제 곧 '대가'를 치르게 되어 '최악의 상황'이 시작되리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걸어가면서 그는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었고 가슴 속에는 기쁨이 솟아났다.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키건은 펄롱의 이러한 행위를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수녀원 세탁소와 직업훈련원과 입양사업을 둘러싼 비리와 의혹을 캐내어 폭로하는 데 잉크를 쏟지 않는다. 높은 벽 안에 숨겨져 있는 비극과 거룩한 가족의 허상을 파헤치려 애쓰지 않는다. 한 없이 작은 한 사람 빌 펄롱의 흔들리는 마음과 고독한 발걸음에만 시선을 모은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저 한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작은 파장으로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느낀다. 자신의 가슴에 잔잔한 쓰나미가 일고 있음을.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을, 무얼 알았을 지를 생각했다."

행진하는 그에게 떠오른 생각이다. 이 대목은 소설의 제목을 해부하는 열쇠로 보인다. 여기 '사소한 것'은 작음(small)을 말하는 것이지 시시함(triviality)이나 하찮음(trifling)을 뜻하지 않는다. 가정부로 일하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펄롱, 끝내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생아인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고 정중하게 대하며 마음을 준 미시즈 윌슨의 사소한 행위와 말들 속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비밀이 있음을 암시한다.

"막 시네트네 애가 오늘 또 땔감을 주우러 길에 나와 있더라고."
"그래서 차를 세웠어?"
"장대비가 내렸잖아. 차를 세우고 태워주겠다 하고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좀 줬어. … 한 백 파운드는 얻은 것처럼 좋아하더라."

소설 초반부에 펄롱이 아내와 잠자리에서 나눈 이 대화 내용이 등장한다. 펄롱에게 짙은 공감(sympathy) 혹은 긍휼(compassion)의 마음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경계인으로서의 펄롱의 태생과 처지는 그런 감각을 넓고 예민하게 키웠을 것이다. 키건은 바로 그 작고도 숭고한 마음을 한 번도 개념화하지 않는다. 그냥 잔잔히 지나치듯 이야기한다. 언론의 요란한 헤드라인이나 격앙된 형용사를 쏟아내는 소설들을 한 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필법이 아닐 수 없다.

펄롱의 걸음은 새로운 가족에 대한 상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돌봄의 끈과 망을 가만히 되짚어보게 한다. 어쩌면 이 점이 이 소설 속에 숨겨져 있는 이상적인 미래 서사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한겨레21의 필자 장인자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은 남녀가 이성애 결혼을 하고 자기 자식을 출산하고 양육하는 '정상가족'을 해체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게 한다. 소설은 펄롱 자신이 혈연관계 바깥의 공동체에서 돌봄 받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돌봄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한다. 돌봄이 내 가족 안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란 것, 여성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공동체의 돌봄에 대한 다른 상상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고요하게 아주 묵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신성한 가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 부부와 내 자녀라는 가족 구도에만 안착할 것인가? 돌봄의 반경이 핏줄이라는 끈으로만 형성되어야 하는 건가? 갑자기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와 이현필 선생의 동광원 이야기가 떠오른다. 또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다. 자기 자녀가 있는데 입양을 선택한 어느 학자 부부, 입양아와 함께 살기 위해 출산을 포기한 어느 선배가 생각난다. 강동의 대안학교 와플과 가평 꽃동네, 도봉산 자락에 있는 어느 공유주택 공동체의 식탁과 웃는 얼굴들도 보인다.

p.s.
책을 시작하며 클레어 키건은 자신의 글을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 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바친다. 그들은 이 땅의 구석진 곳에서 인권이 유린당하는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장애인들과 차별받고 방치되는 모든 약한 자들이기도 하다. 가정의 달이다. 정상가족과 핵가족, 전통적 효 정신으로 치장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의 기호를 넘어 움트는 새로운 가족의 서사를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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