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시간의 노예가 안되는 법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8-21 10: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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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괴물처럼 우리 삶을 삼키고 속박해
의미 창조하고 현재를 향유하는 지혜 필요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가 인도의 어느 양로원을 방문했다. 시설은 부족한 것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여느 가정집보다 시설이 더 호화롭고 편리했다. 그런데 모든 노인들이 출입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밝은 얼굴을 하고 있거나 웃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테레사에게 그것은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람의 수명을 90세로 볼 때, 잠자는 시간은 30년, 일하는 시간은 21년7개월, 식사하는데 3년4개월, 공부하는데 5년7개월, 독서하는데 1년7개월, 흡연에 3년8개월, 음주에 3년3개월, 대소변 등 생리현상 1년9개월, 텔레비전 시청과 게임에 7년6개월, 커피 타임 3년8개월, 이동과 교통수단 이용에 1년3개월, 운동에 1년3개월을 사용한다는 통계가 있다. 

측정 범주가 단순하고 주로 인간의 외형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통계를 냈지만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질(質)일 것이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하며 자신에게 가치 있는가? 이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 시간에 얽매일수록 고통스러워져

현대인은 늘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자주 시간을 놓친다. 흔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자신에게 시간이 모자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계산하고 통제하려고 할수록 그에 비례해 여유로움을 잃어버린다. 겉으로는 일정을 짜서 시간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형국이다. 시간은 결코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χρόνος, Chronos)는 시간을 지배하는 신이다. 크로노스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웠다. 그는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고, 그와 같은 일이 자신에게 발생하지 않도록 태어나는 자식들을 차례로 잡아먹었다. 이는 시간의 파괴적인 속성을 잘 드러낸다. 크로노스는 만성적인(chronic) 불안과 스트레스, 만성 질병에 시달렸다. 의학용어인 'chronic'은 크로노스(Chronos)에게서 유래했다. 사람들은 크로노스 신을 숭배하며 시간의 노예이자 먹이가 됐다.

그때 제우스의 막내 아들이자 크로노스의 손자인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가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 카이로스는 한 번 지나가면 붙잡을 수 없는 기회의 신이다. 카이로스의 외양은 특이하다. 앞머리의 숱은 길고 뒷머리는 벗겨져 있는 대머리이며, 어깨와 다리에 날개가 달려 있다. 긴 앞머리는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후두부가 대머리인 것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날개들은 사라지듯 빨리 지나간다는 뜻이다. '기회의 신은 앞머리 밖에 없다'는 속담은 여기서 유래했다. 카이로스를 붙잡는 사람만이 무섭게 삶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면 외형적 성공과 돈과 권력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크로노스의 아가리에 삼킴을 당했다.

이처럼 그리스어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두 가지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일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흐르는 연속적인 시간을 나타낸다면, 카이로스는 일순간의 기회나 호기(好機), 주관적인 경험의 시간을 말한다. 전자는 물리적 시간이고 후자는 주관적 경험의 시간이다. 전자가 시계로 측정이 가능한 양적인 시간이라면 후자는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되는 질적인 시간이다. 전자는 기계적 시간이고, 후자는 사건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섬기면 만성적인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기 마련이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추구하면 의미 있고 활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카이로스의 시간 창조하기

그러면 어떻게 카이로스의 시간을 창조할 수 있을까?

먼저, 의미있는 순간들과 기회들을 만드는 것이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각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된다. 현대 철학이나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를 주거나 절대적 가치를 지닌 특정한 행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문화권마다 크게 다르다. 의미는 우리의 개입과 행위를 통해 매순간 창조된다. 대개는 몰입하는 노동과 공동체적인 활동이, 혹자에게는 공부와 독서와 문화예술 활동이, 때로는 봉사활동이나 남은 돕는 행위가, 어떤 경우에는 요리를 하며 함께 음식을 먹는 시간이, 새로운 만남이나 사랑의 관계가, 때로는 고독의 시간이나 홀로 하는 여행이 의미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적 실천이나 거리와 광장에서의 외침이, 흔히 축제나 여행이나 산책이, 혹자에게는 식물을 가꾸는 일이나 동식물과의 교감이, 한 잔의 차와 한 곡의 음악이, 혹은 영성 수련이나 마음공부가 가장 활력 있고 소중한 순간이 된다. 나 자신만이 즐겁고 나에게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연결되는 많은 이들이 함께 의미를 발견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둘째, 게으름의 여유를 가지는 일이다.
게으르게 사는 법을 터득할 때 카이로스의 순간들을 창안할 수 있다. 철학 혹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게으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활력 있는 삶의 방식이자 능동적 선택으로 만들어내는 삶의 미학이다.

게으름에는 능동적 게으름과 수동적 게으름이 있다. 능동적 게으름은 자발적으로 삶의 여백과 느림을 선택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이는 여유라는 개념과 통한다. 게으름이 여유가 될 때 이는 자기 성찰, 쉼, 솔직함과 개방성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호기심과 창의성을 자극하여 삶의 활력을 더해 준다. 자유로운 직업이나 신분을 지니고 경제적인 기반이 탄탄해야만 게으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리 합당하지 않다. 그 어떤 여건에 있더라도 다르게 살기로 결심하고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 충족적인 삶의 내공을 지닐 때 능동적 게으름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 수동적 게으름은 어쩔 수 없이 혹은 습관으로 굳어진 게으름이다. 이런 게으름은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음 또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경험이자 우리 시대에 만연한 게으름 현상이기도 하다. 익히 알고 있듯이 그 결과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수동적 게으름은 지루함으로 이어지고 무기력이나 우울한 기분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지루한 여흥이나 자기 소모적인 오락, 알콜 중독 등과 같은 흐름으로 이어지기 쉽다.

능동적 게으름은 해야 할 일을 마냥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바람직하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일을 지금 곧바로 행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일과 관계에 마음과 정성을 담아 행하는 것이다. 모임이나 일거리를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진행되도록 조율하는 것이다. 게으름의 길을 선택하며 시간이 많이 남아돈다고 당황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일할 거리나 소일거리를 만들려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무언가 비효율적이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불안감이나 자신이 나태하거나 무능력하다는 자책감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당당하게 게으르고 알차게 일한다. 이처럼 게으르게 살기는 자기 주도적으로 시간의 흐름과 역동을 바꾸는 삶이다. 그러면 많은 시간들이 카이로스로 채워진다.

셋째, 향유의 감각을 기르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매 순간을 누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향유(savoring)는 지금 – 여기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느낌과 기쁨을 지각하고 충만하게 하는 감각이다. 이러한 향유 경험은 시간의 질을 크게 변형시킨다.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거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놓치는 데 익숙하다. 어떤 장소에서 그 어떤 대상과 연결되어 어떠한 경험을 하더라도 그 과정을 향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쉼브로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의 한 대목에서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 감각을 얼핏 엿보게 된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 쉼보르스카 시선집, 문학과지성사, <끝과 시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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