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ESG 풍향계] 유럽발 '공급망 규제'...韓수출기업 '직격탄'

최남수 서정대 교수 / 기사승인 : 2024-04-19 11:04:56
  • -
  • +
  • 인쇄

ESG 관련 이슈 중 '뜨거운 현안'인 공급망에 대한 환경 및 인권 실사는 최근들어 관심의 초점이 됐지만 사실은 오랜기간 글로벌 무대에서 논의돼온 주제다. 시발점은 다국적 기업의 활동으로 인한 피해사례가 잇따르던 지난 2010년대였다. 이때부터 환경과 인권 실사를 강화하기 위한 법안과 제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1년에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을 개정해 처음으로 기업 차원에서 실사를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국제연합(UN)도 2011년에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을 채택했다. 이어 개별 국가들이 이 움직임에 동참했다. 영국의 현대판 노예방지법(2015년), 프랑스 실사의무화법(2017년), 네덜란드 아동노동실사법(2019년), 독일 기업공급망 실사법(2021년) 등이 그 예이다.

이런 흐름이 큰 틀로 결집된 것이 지난 3월 15일 유럽연합(EU) 27개국 상주대표회의에서 승인된 '기업 지속가능성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이다. 이 지침은 닷새 뒤인 3월 20일에 유럽의회 법률위원회를 통과해 이제 의회의 입법 절차만을 앞두고 있다. CSDDD는 초안보다는 완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대상 기업이 직원 500명에서 1000명 이상으로, 그리고 연간 매출액이 1억5000만유로에서 4억5000만유로 이상으로 축소됐다. 지침 적용대상 기업이 당초 안의 30% 선으로 크게 줄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업 부담 가중을 이유로 반대한 독일 등의 국가 입장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지침은 기업이 공급망 내 환경 및 인권 관련 부정적 영향을 식별한 후 이를 예방·제거·완화하기 위한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고 실사를 기업 정책 전반에 통합하도록 하고 있다. 실사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과 협의하고 고충처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또 지구의 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억제하기로 한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맞춰 기업이 기후전환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피해 당사자와 노조 그리고 환경 및 인권단체들이 기업을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다. 지침을 위반한 기업에는 전세계 순매출의 5% 이상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CSDDD는 국가별로 다른 공급망 실사 체계를 유럽 단위에서 표준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본질은 공급망의 투명성을 높임으로써 기업이 공급망에 대한 규제가 약한 국가로 생산을 이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 지침은 기준을 충족하는 EU 역내외 기업과 공급망 전반에 적용된다.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국내 기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되는 이유다. 정부 집계를 보면 대EU 수출기업은 1만8000여개에 이른다. 이 중 중소기업이 1만6206개로 90%를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런 제도와 별도로 ESG 경영을 도입한 대기업들이 거래처인 중견·중소기업을 상대로 ESG를 평가하고 실사하는 등의 '사적 자율규제'를 광범위하게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전신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30대 그룹 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 75개사 중 76%인 57개사가 공급망에 대해 ESG 관리를 하고 있으며, 59%가 협력사가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만들어 이를 준수하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영국 은행인 스탠다드차터드는 다국적 기업의 78%가 공급망에서 배출되는 탄소량이 전체의 73%를 차지하는 현실을 중시하고 자사의 탄소 감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협력사들을 배제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협력사 중 35%가 공급망에서 제외될 것으로 지적되고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BMW는 3년동안 평균 150여개사, GE는 71개사와 거래를 중단했다.

문제는 공급망에 대한 규제 강도가 높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의 대응 수준은 상당히 부진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데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수출기업 20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CSDDD에 대한 대응 수준은 100점 만점에 35점에 불과하다. 기업 규모별로는 대기업이 47점, 중견기업 41점, 중소기업 30점이다. 상의의 또다른 조사에서는 수출기업의 77.2%가 공급망 실사에 대비한 수준이 '낮다'로 응답했다. 'ESG 수준이 미흡해 계약이나 수주 파기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 비율도 52.2%에 달했다.

제도와 사적 규제의 형태로 몰려오고 있는 공급망 실사의 파고(波高)는 국내 기업의 대응 수준에 관계없이 이미 글로벌 비즈니스 룰의 대세가 됐다. 환경 훼손과 인권 침해가 일어나는 사업장은 공급망에서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급망 실사 지침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기업이 절반이 넘는 국내 상황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중견·중소기업에 대한 ESG 진단과 컨설팅, 인력 육성과 자금 등 맞춤형 지원, 원청과 협력업체의 공조 체제 구축 등 적극적인 대책 시행이 시급하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 최남수서정대 교수 nschoi@seojeong.ac.kr  다른기사보기
  • 현 서정대 교수/SK증권 ESG위원장/전 YTN 대표/ 전 MTN 대표

핫이슈

+

Video

+

ESG

+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신제윤...대표이사 전영현 선임

신제윤 사외이사가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에 선임됐다. 또 전영현 부회장이 삼성전자 대표이사로 선임됐다.삼성전자는 19일 '제56기 정기 주주총회' 직

화학·시멘트·반도체...고배출산업 '탄소감축 기술' 공동개발

화학산업, 시멘트산업, 반도체산업 등 고배출 산업군이 모여 기후테크를 연구개발하기 위한 협의체를 출범시킨다.환경부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19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 '글로벌 경영' 관심도 1위에 뽑혀

지난해 국내 금융지주 수장들 가운데 하나금융의 함영주 회장이 '글로벌 경영'에 가장 관심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양종희 KB금융 회장과 진옥동 신

美기업들 너도나도 '기후변화' 지우기…트럼프發 '그린허싱' 확산

월마트와 하인즈 등 다수의 미국 기업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 기후정책에 발맞춰 홈페이지에서 기후변화나 친환경과 관련된 내용을

서울시, 버려지던 바이오가스로 8500가구에 에너지공급

서울시가 버려지던 바이오가스를 활용해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사업을 이어간다.서울시는 지난 5일 예스코와 '중랑물재생센터 바이오가스 공급 및 수

대기업 ESG위원회 '유명무실'...회의도 안건도 '요식행위'

ESG경영이 본격화된지 4년이 지났지만, 국내 대기업 가운데 ESG위원회를 설치한 기업은 아직도 절반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설치된 ESG

기후/환경

+

온난화로 점점 건조해지는 대기..."호흡기 질환자 증가할 것"

기후변화로 점점 건조해지는 대기는 기도에 탈수와 염증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기도에 염증이 발생하면 천식, 알레르기성 비염

COP30 최고경영자 "기후대응 강화하지 않으면 전쟁 증가할 것"

다가오는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의 최고경영자가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더 많은 전쟁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8일

기후 마지노선 1.5℃ 뚫렸다...지난해 1.55℃까지 상승

가장 뜨거웠던 한해였던 2024년을 거치면서 지구 평균기온은 약 1.55℃까지 올랐다. 이는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지구 평균기온 임계치로 설정했던 1.5℃

호주 해변가를 뒤덮은 수상한 거품...물고기들도 떼죽음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웨이트핑가와 파슨스 해변은 수상한 거품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거품 때문에 인근의 해양생물들이 집단

한은의 경고..."기후대응 안하면 2100년 금융손실 46조"

국내 금융권에서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2100년에 이르러 금융권 누적손실이 46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분석이다.한국은행은 18일 금융

'반중·反환경' 트럼프 고립될라...英-中, 기후회담으로 밀착행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약에 탈퇴하는데 이어 각종 환경규제를 철회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과 중국이 기후협력에 나서면서 반(反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