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나와 그녀의 <세월>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4-02 08:30:03
  • -
  • +
  • 인쇄


"나는 체험한 것만 쓴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말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언하는 그녀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고 투명하게 여러 작품에 풀어냈다. 에르노는 그녀의 대표작 <세월>에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며 온갖 기억들의 조각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한다. 오래된 '사진' 장면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고, 자신이 체험한 어떤 일의 기억을 묘사하기도 하고 '비디오영상'을 설명하기도 한다. 마치 일기와 아포리즘, 인용문들과 메모 조각을 편집한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전혀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1. 소설 <세월> 속 그녀

소설 속 화자는 '그녀'다. 그녀는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있는 삶'을 다룬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여자의 운명같은 것에 대한 글"(210), "오늘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272)를 모으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글을 쓰고자 하는 생각과 열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940년과 1985년 사이, 여성의 운명같은 것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1985년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한다." 1992년
"1940년부터 오늘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다는 설움에 죄책감마저 더해져 점점 더 그녀를 붙잡는다." 1993년
"20년째 자신의 분신이자 동시에 앞으로 점점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될, 아직 미완성인 수천개의 메모 상태에 불과한 이 책을 시작해야만 한다." 1999년 추정
"영감을 받은 단어들이 마법을 부려 등장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상은 없으며 그녀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일한 도구, 오직 자신의 언어 안에서만, 모두의 언어 안에서만 쓸 것이다 그러므로 써야할 그 책이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그녀는 이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에르노는 인터뷰집 <진정한 장소>에서 <세월>을 쓴 이유와 과정을 세세하게 언급하며 일종의 구원의 충동과 같은 것을 고백한다.

"40세 즈음에 제 인생을 생각하면서 전 세계와 프랑스에서 전쟁 후부터 1980년 사이에 일어났던 변화들을 놀라워하며 지각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여성들에게 일어났던 변화들을요. 제가 써야 했던 책은 바로 그것, 저의 내부와 저의 외부에서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것이었죠. … 저는 전쟁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제가 의식하게 된 순간부터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제 인생의 무언가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2. '나'와 '그녀' 사이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나'와 '그녀' 사이의 선택이다. '나' 안에는 너무나 확고부동한 것들, 편협하고 숨막히는 무언가가 있고, '그녀' 안에는 너무 많은 외재성과 거리감이 있다.' <세월>, 238

소설 속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에르노는 글 쓰는 자신과 글에 등장하는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다. 왜 자신과 소설 속 인물 사이에 거리를 두고자 했을까? 먼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성찰적 거리를 확보하려는 것일 게다. 적절한 거리를 둘 때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신의 작품이 개인의 진실을 넘어 역사 및 사회적 진실을 담아내기를 바라는 기대가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로 전개되므로 작가 자신이 주인공 혹은 특별한 존재로 초점화 되지 않는다. 에르노와 작품 속 화자 사이의 이러한 거리는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순도를 높여준다. 사실성과 진실성의 농도 말이다.

나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말하고 자신의 서사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말하는 일은 단지 문학적 기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는 1인칭 주체를 내던지고 '나'라는 틀을 벗어나는 탈주이자 새로운 자신을 생성하는 창조적 배치이기도 하다.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들려줄 수 있고, 자신의 '세월'을 서사로 쓸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기 생각이나 자기 이야기를 '그' 혹은 '그녀'의 것으로 말하면 병리적인 징후로 본다. '엄마, 철수가 배가 고파요."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엄마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용인되지만 학령기 어린이나 성인이 그렇게 말하면 다들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글 쓰는 이는 그런 식으로 말할 자유와 권리를 지녔다. 아니 그런 거리 만들기와 분열적 배치가 글쓰기의 역동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글을 쓰는 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자기 삶을 조망하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해방의 경험이자 힐링의 순간들이다. 그래서 작가는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를 벗어나는 희열과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재구성하는 힘이 쓰기 과정에서 솟구치기 때문일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과연 글쓰기는 글 쓰는 자신을 구원한다.

"우리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일 따름이다. 작품을 판단하는 규준을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거기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의 사랑이며 우리의 기쁨이다."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3. 나의 세월과 서사

<세월> 속의 그녀는 누구인가? 한 여성 아니 에르노다. <세월>을 읽는 독자는 에르노가 '그녀'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약간 거리를 두고 소설 속 '그녀'를 볼 수 있다. 그녀는 고유하고 유일하다. 그녀는 20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 살았던 한 사람의 유럽인이자 지식인 여성이다. '그녀'를 현대인이라는 보편적 주체나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볼 순 없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나와 다르다. 그녀 아니 에르노는 그녀의 세월을 살았다. 우리는 우리의 세월을, 나는 나의 세월을 산다.

<세월>을 읽으면서 나의 <세월>을 조망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면 큰 행운이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 하나 있다. 자신의 세월을 기억하고 쓰도록, 지금의 세월을 맘껏 살아가도록 나의 시간과 서사 감각을 일깨우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하나금융 'ESG스타트업' 15곳 선정...후속투자도 지원

하나금융그룹이 지원하는 '2025 하나 ESG 더블임팩트 매칭펀드'에 선정된 스타트업 15곳이 후속투자에 나섰다.하나금융그룹은 지난 2일 서울시 중구 동대

과기정통부 "쿠팡 전자서명키 악용...공격기간 6~11월"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고는 전자서명키가 악용돼 발생했으며, 지난 6월 24일~11월 8일까지 공격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됐다.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

李대통령, 쿠팡에 '과징금 강화와 징벌적손배제' 주문

쿠팡이 개인정보를 유출한 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의 국내 첫 사례가 될 전망이다.이재명 대통령이 2일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건에 대해 "사고원

이미 5000억 현금화한 김범석 쿠팡 창업자...책임경영 기피 '도마'

3370만명의 개인정보가 무단으로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한 쿠팡의 김범석 창업자가 1년전 쿠팡 주식 5000억언어치를 현금화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비

우리금융지주 차기 회장후보 4명으로 좁혀졌다

우리금융지주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차기 회장 최종 압축 후보군으로 임종룡 회장, 정진완 우리은행장 및 외부 후보 2명 등 총 4명을 선정했다고 2일

[최남수의 ESG풍향계] 조정기간 거친 ESG...내년 향방은?

올 한 해 ESG는 제도적으로 조정기간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1월에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고 SEC(증

기후/환경

+

껌은 '미세플라스틱 폭탄'...플라스틱 성분인데 규제 사각

껌이 플라스틱 성분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때문에 껌을 씹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미세·나노플라스틱을 섭취하는

사람잡는 '칠레 연어'...항생제 범벅에 열악한 노동환경까지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연어가 양식과정에서 심각한 환경오염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열악한 근로환경으로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나

'청정호수'인줄 알았는데...50년간 미세플라스틱 쌓였다

인간의 접근이 거의 없어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인도의 호수에서 50년간 미세플라스틱이 차곡차곡 쌓여왔던 것으로 확인됐다.카사라고드와 마니팔 지

[날씨] 첫눈부터 10㎝ '펑펑'...한파에 빙판길 '조심'

올해 첫눈부터 최대 10㎝가 넘는 많은 눈이 쌓이겠다.3일 서해안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많은 눈이 내리겠다. 이날 낮부터 밤 사이에는 충남 남부 내륙과

올해 모기 개체수 28%나 줄었다...이유는?

올해 우리나라 모기 개체수가 지난해에 비해 28%나 줄었다. 원인은 모기도 견디기 힘들만큼 폭염이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질병관리청은 모기 발생시

동남아 홍수·산사태로 1100여명 희생...원인은 '기후변화·난개발'

우기에 접어든 동남아시아가 역대급 폭우로 발생한 홍수와 산사태로 현재까지 1100명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고, 앞으로 희생자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2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