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폭염에 잣 수확량 95% 줄었다"...가평 잣 농가들 '한숨'

이재은 기자 / 기사승인 : 2024-11-15 10:35:31
  • -
  • +
  • 인쇄
꽃 피고 15개월 지나야 잣 수확하는데
폭염과 폭우에 취약...서식지도 변화
▲경기도 가평군 축령로에서 48년동안 잣을 수확해온 이수근 씨는 "올해 수확량이 95%나 줄었다"면 한숨을 지었다. ⓒnewstree


경기도 가평군 축령로에 있는 한 잣 공장. 수확철 막바지여서 잣 탈각기는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탈각기를 바라보는 농부의 표정은 썩 밝지 않다. 이곳에서 48년동안 잣을 재배하고 수확해왔다는 이수근(64) 씨는 "올해는 송이 안에 온통 쭉정이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탈각기 앞쪽에는 껍질을 까기도 전 밑 부분이 썩어 문드러져 휑하니 벌어져있는 잣 송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잣송이를 손으로 집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이사이 영글어 있어야 할 피잣은 온데간데 없고 시커먼 빈공간만 보였다. 이수근 씨는 "올해 잣 수확량이 95%나 줄었다"면서 "반세기 잣 농사를 지으면서 이렇게 심각했던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올해 수확량이 없으니 내년도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가평 잣생산자협회 한 관계자는 "올해 수확량이 너무 떨어지다보니 수확한 피잣을 백잣이나 황잣으로 만드는 가공공장들도 가동을 중단한 곳이 많다"면서 "그나마 수확한 잣들도 예년에 비해 품질이 크게 떨어져 지난해 1kg에 10만원하던 잣 가격은 지금 15만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말했다. 가격이 30~40% 인상된 것이다.

▲정상적으로 생장한 잣(왼쪽)과 폭염으로 썩어문드러진 잣 ⓒnewstree


잣 농가들은 올해 잣 작황이 급격하게 나빠진 원인에 대해 2년간 지속된 '폭염'을 지목했다. 5월에 꽃을 피우는 잣은 열매가 열리면 15개월 뒤에 수확할 수 있다. 통상 잣은 8월말~11월 사이에 수확하는데, 수확하기까지 여름을 두번이나 나기 때문에 밤과 달리 2년생이다. 그런데 잣은 폭염에 취약하다.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잣나무 특성상 폭염이 발생하면 잣 송이의 꼭지가 물러져버린다. 송이가 생긴다고 해도 잣이 맺히지 않는 쭉정이 송이가 된다고 한다.

실제 지난해와 올해는 유난히 더웠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2023년 6~8월 전국 평균기온은 예년보다 1℃ 높은 23.7℃였다. 올여름 평균기온 역시 25.6℃로 예년보다 1.9℃ 높게 나타났다. 8월 평균기온만 놓고보면 예년보다 무려 2.8℃나 높았다. 열대야일수도 예년보다 3배 긴 20.2일이었다.

지구온난화가 가져온 '폭염'이 올해로 그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잣 농가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잣생산자협회 관계자는 "지난 2016년 잣 생산량이 정점을 찍을 정도로 풍성한 한해를 보낸 이후 2018년부터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면서 "잣은 기온변화에 민감한데 2017년부터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어서 앞으로 생산량은 계속 줄어들 것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폭염뿐 아니라 폭우도 문제다. 잣나무는 뿌리가 깊게 내려가지 않고 1m 깊이에서 똬리를 틀기 때문에 강풍을 동반한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뿌리채 뽑혀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기후가 변화하면서 재선충병을 옮기는 외래 변종 해충들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잣나무들의 영양상태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2023년 임산물 생산조사에서부터 잣 주산지는 더 이상 가평군이 아닌 홍천군으로 뒤바뀌었다.  (자료=산림청)


기후변화로 잣의 주산지도 태백산맥에 가까운 고지대나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산림청 임산물 생산조사에 따르면 2022년까지만 해도 336톤의 잣을 생산하며 국내 잣 생산량 1위를 굳건히 지켜오던 가평군은 지난해 생산량이 25톤으로 쪼그라들면서 홍천군에 주산지를 내줬고, 춘천시, 영월군에도 생산량이 밀리고 있다. 이에 대표 특산물로 잣을 내세우던 가평군청은 내년부터 대체 특산물을 찾을 계획이다.

이수근 씨는 "가평에서 잣 생산량이 줄어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면서 "이미 7년 전부터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6개 잣 공장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재 남아있는 잣 공장은 30개 남짓인데, 만약 내년까지 흉작이 이어진다면 이마저도 대부분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가평군의 잣나무 감소는 우리나라 잣 재배지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잣나무는 열매를 맺기까지 20년 이상 걸리고, 상품성 있는 잣을 수확하려면 수령이 30년은 넘어야 한다. 고지대로 잣나무 서식지가 이동한다고 해도 가평처럼 품질좋은 잣을 생산하려면 수십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대관령과 태백 등 고지대도 폭염이 닥치면서 이 지역 잣 품질도 크게 떨어진 상태다. 올 9월 대관령과 태백의 낮 최고기온은 30.5℃, 32.7℃에 이를 정도로 고온에 시달렸다. 고지대도 폭염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잣 수확량이 감소하면서 국산 잣을 사용하는 식품업계도 공급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잣 물량도 딸리지만 가격도 껑충 뛰어서 원료비 상승에 따른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수근 씨는 "지금 식음료업체들은 서로 잣을 차지하려고 전쟁중"이라며 "과거에는 잣이 수정과, 잣죽 정도에만 사용됐지만 지금은 잣 효능이 알려지면서 장류나 양념류, 스낵류에까지 잣이 널리 사용되는데 잣 생산량은 갈수록 줄고 있으니 난리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산 잣 생산량이 매년 감소함에 따라 잣을 사용하는 식음료업계까지 이 불똥이 튀고 있다. 잣 농가들은 "잣 수요는 점점 늘어나는데 생산량이 감소하면 결국 몽골산이나 러시아산 잣을 수입하지 않겠나"라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잣은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 덕분에 영양성분이 좋기로 유명한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앞으로 온난화가 더 진전될수록 한국산 잣은 더 구하기 힘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과기정통부 "쿠팡 전자서명키 악용...공격기간 6~11월"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고는 전자서명키가 악용돼 발생했으며, 지난 6월 24일~11월 8일까지 공격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됐다.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

李대통령, 쿠팡에 '과징금 강화와 징벌적손배제' 주문

쿠팡이 개인정보를 유출한 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의 국내 첫 사례가 될 전망이다.이재명 대통령이 2일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건에 대해 "사고원

이미 5000억 현금화한 김범석 쿠팡 창업자...책임경영 기피 '도마'

3370만명의 개인정보가 무단으로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한 쿠팡의 김범석 창업자가 1년전 쿠팡 주식 5000억언어치를 현금화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비

우리금융지주 차기 회장후보 4명으로 좁혀졌다

우리금융지주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차기 회장 최종 압축 후보군으로 임종룡 회장, 정진완 우리은행장 및 외부 후보 2명 등 총 4명을 선정했다고 2일

[최남수의 ESG풍향계] 조정기간 거친 ESG...내년 향방은?

올 한 해 ESG는 제도적으로 조정기간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1월에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고 SEC(증

'개인정보 유출' 쿠팡 수천억 과징금 맞나...SKT 사례보니

쿠팡이 3370만건에 달하는 개인정보가 무단으로 노출되는 사고로 수천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게 생겼다.2023년 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법 위

기후/환경

+

동남아 홍수·산사태로 1100여명 희생...원인은 '기후변화·난개발'

우기에 접어든 동남아시아가 역대급 폭우로 발생한 홍수와 산사태로 현재까지 1100명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고, 앞으로 희생자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2

英, 모잠비크 가스전 11.5억달러 지원 철회...기후위기 위험 때문?

영국이 11억5000만달러, 우리돈 약 1조6876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모잠비크 천연가스 프로젝트 지원금을 철회했다. 1일(현지시간) 피터 카일 영국 기업부

남극 오존층 구멍이 작아지고 있다...6년來 최저 크기

남극 오존층 구멍이 최근 6년 내에 가장 작게 형성됐다.1일(현지시간) 유럽의 지구관측프로그램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C3S)'는 올해 남극 오존

[날씨] 칼바람에 한반도 '꽁꽁'...3일 체감온도 -12℃로 '뚝'

2일 한반도로 유입된 북서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급속하게 떨어지면서 최강한파가 찾아오겠다.이날 아침 중국 북부에서 확장된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탄소제도 공유하는 국제연합 출범..."각국 운영경험 교류협력 기구"

전세계 규제기반 탄소시장을 강화하기 위한 국제연합체가 공식 출범했다.1일(현지시간) 미국 E&E뉴스는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

메탄 뿜뿜하는데...캐나다 '가스플레어링' 규제 '뒷짐'

캐나다 앨버타주가 석유·가스 시설의 가스플레어링 단속을 사실상 중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1일(현지시간) 월드에너지뉴스(Wor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