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미국의 고율 관세를 피하기 위해 미국산 에너지 3년간 7500억달러(약 1000조원)를 구매하기로 약속했지만, 실제로 이를 이행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EU는 미국에 6000억달러(약 830조원)를 투자하고, 반도체·항공 부문 일부 품목에 대해 무관세를 적용받는 조건으로 자동차 관세를 15%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또 EU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 내에 EU는 7500억달러(약 1000조)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하겠다고 약정했다.
그러나 3년 안에 EU가 1000조원에 이르는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선 미국이 한해 330조원에 달하는 에너지를 유럽에 공급할 여력이 있는가다. 에너지 시장조사업체 케이플러(Kpler)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 석유와 가스를 모두 합쳐서 우리 돈으로 222조원 어치를 수출했다. 한해 수출액을 몽땅 합쳐도 EU에 한해 330조원에 달하는 물량을 수출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미국이 자국의 에너지 수출물량을 EU에 몽땅 몰아준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EU에서 미국산 원유를 정제할 수 있는 시설과 기술이 있느냐다. 미국이 주로 수출하는 원유는 '경질·저유황(light sweet)' 원유다. 반면, EU 정유업체들은 대부분 러시아산이나 중동산 '중질유'를 정제하는데 맞춰져 있다.
미국산 경질유가 대량으로 수입되면 현재 정유 설비로는 정제 효율이 떨어져 원하는 연료를 생산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유업체들은 미국산 원유의 수입 비중을 전체 물량의 14% 이상 높이면 오히려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입장이다. 현재 EU 정유업체들이 수입하는 미국산 원유의 비중은 전체 물량의 12% 수준에 불과하다. 설비 구조상 이 비중을 더 늘리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또 있다. EU는 에너지 수입을 전적으로 민간기업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수입을 강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EU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미국산 에너지 수입 목표를 약정했지만 실제로 이를 수입해야 하는 주체는 민간기업들이다. EU 행정부가 "수입하겠다"고 발표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수입할 수 있는 시장구조가 아니라는 얘기다.
EU집행위의 한 고위관계자도 이같은 한계를 인정하며 "이번 목표는 EU같은 공공기관이 직접 보장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며 "EU는 기업들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도의 역할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상황을 종합하면 EU와 미국이 합의한 '3년 반동안 1000조원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가 현실화되기 힘들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U는 미국산 에너지 구매 확대 의향을 밝힌 것이지, 실제 물량 확보나 구매를 통제할 권한은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한 에너지 무역상은 "기업들이 이윤을 따지지 않고 움직일 이유는 없다"며 "현실적으로는 아무 영향이 없는 발표"라고 일갈했다.
그럼에도 EU가 이 수치를 공개한 배경은 정치적 압박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 앤소피 코르보 연구원은 "EU는 30% 관세를 피하기 위해 어떤 숫자든 제시할 준비가 돼 있었던 것같다"고 말했다.
결국 7500억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수입 목표는 아무런 권한과 기술도 없는 EU 행정부가 미국에게 공수표를 던진 셈이다. 실행 가능성이 거의 없는 '뻥카'로 EU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핵심카드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협상조건은 EU가 정치적 계산 아래 제시한 '명목상의 약속'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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