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말 바꾸기의 힘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7-31 08: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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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긍정하는 사람이 더 활력있어
푸념보다 말부터 바꿔야 힘이 생겨

최근 30대 한 청년이 술이 취해 내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청년은 신세타령을 하며 '돈이 필요한데 자신에게는 그런 돈이 없다'는 등 횡설수설을 했다. 지인은 찬찬히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 결핍은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고, 부족함이 있을 때 풍요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슬픔을 알아야 진정 기뻐할 수 있으며 고통을 경험할 때 삶의 진실을 경험하게 된다고.

자기 친구 사례도 들려주었다. 그 친구는 엄청난 거부인데 삶의 무의미성과 권태로 힘겨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무슨 일을 하며 살까? 더이상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 세계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보았는데 이제 할 만한 일도 의미있는 일도 없어서 무료함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삶,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자네와 같은 조건에서 역동적으로 진행된다'고 말해주었다. 이 청년은 술자리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동석한 벗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조언을 들으며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내 마음이 훈훈해졌다.

◇ 권태에 빠진 사람 vs. 삶의 무게로 힘겨운 사람

최근 세상을 떠난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생각났다. 그의 소설 <정체성>에서 소설 속 인물 장마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태가 측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 권태의 양은 과거보다 훨씬 늘었다고 할 수 있지." 장 마르크는 권태를 세 가지 범주로 분류했다. '수동적 권태. 춤을 추고 하품하는 소녀. 적극적 권태. 연 애호가. 반항적 권태.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창유리를 깨는 젊은이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권태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았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든, 실직 상태에 있든 사람들이 삶의 무의미와 무관심의 열정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들 역시 일상에 만연한 권태를 이기지 못해 대화거리나 흥미로운 일거리 등 심심풀이를 찾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알다시피 바로 이런 수요에 맞춘 온갖 상품들과 서비스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랍비 샤피라(Haim Shapira)가 이런 묘한 말을 했다. "욕망의 목록에는 지루함도 포함된다." 그에 의하면 지루함은 욕망을 갖기 위한 욕망이다. 다분히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호소력이 있다. 지구촌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풍요가 가져다주는 무료함과 권태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서구 백인 주체들에게 말이다. 궁핍이나 기회 박탈로 삶의 기반이 취약하거나 벼랑에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그런 한가함이란 없다. 권태란 일부 유한 계층의 전유물로, 긴장과 고통은 다수 서민들의 운명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권태의 안과 밖, 우리는 어디에 가까울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고통을 긍정하는 사람이 권태와 무의미성에 빠진 사람들보다 삶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말을 바꿀 때 삶이 달라져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진지하다. 하지만 삶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삶은 사회라는 관계의 장(場)에서 펼쳐지고 그 속에 내재된 온갖 힘들의 역동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타자가 욕망하는 것들을 욕망한다. 서로 비교하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비하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모른다.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자신을 한 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난 보잘 것 없어, 난 가진 게 없어, 난 연약한 여자야, 난 못생겼어, 난 공부를 못해, 우리 집안은 흙수저야, 의미 있는 것이란 어디에도 없어.' 이처럼 내 속에 기입된 온갖 생각들, 가치들, 선입견들, 규정된 정체성, 무의식 속에까지 침투해버린 통념들을 넘어서지 못하면 삶은 우울해지고 활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한 흑인 작가가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흑인사회에 영향력 있는 리더였다. 그런 그도 젊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이 비관했다고 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검은 피부 때문이었다. 피부만이 아니다. 입술도 두툼하고 머리카락도 흉하게 휘어지는 곱슬머리다. 그가 자신의 외양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하루는 강력 세재로 종일 피부가 상하도록 문질렀다고 한다. 피부색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절망해 방구석에 박혀 두문불출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오랜 사색과 묵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발견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이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Black is Beautiful!' 검정은 아름답다! 이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밝은 마음으로 자신이 발견한 진리와 환한 마음을 글로 담았다. 그는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흑인 해방운동의 지도자 말콤 엑스다.

말을 바꾸는 것이 먼저다. 내게 익숙한 언어를 다른 용법으로 사용하고, 기존의 언어에 담겨있는 의미나 가치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뒤집는 말을 사용할 때 새로운 흐름이 시작된다.

◇ 파라독사의 사유와 실천이 필요해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언어가 작동하는 계열의 흐름을 파라독사(para-doxa)라는 말로 흥미롭게 다룬다. 'doxa'는 특정사회와 그 안에 떠돌아다니는 의견과 통념들을 말한다. 'para'는 평행선(parallel)이라는 말에서처럼 '나란히 나아간다'는 뜻이다. 언어의 세계는 이와 같다. 두 의견, 즉 독사와 파라독사가 평행선을 그으며 나아간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지지하거나 주류 흐름을 담으면 그 사회에서 함의하는 단어의 의미(뜻)가 결정된다. 이는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배제하고 이긴 것이다. 하지만 파라독사는 승부 없이 계속 평행을 달리며 새로운 의미를 추구한다. 그 핵심은 기존의 언어와 말의 용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고 낯선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요즘 인구감소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온갖 정부 정책과 해법들이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사회적 표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여성계와 학계에서 제기해 왔다. '저출산'이란 용어는 아이를 적게 낳는 주체에 무게를 두는 말이다. 한마디로 여성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반면 '저출생'은 출생인구가 줄어드는 사회와 그 시스템에 주목하게 한다. 인구감소의 책임은 여성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책임이며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극복하고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치중립적인 용어 즉 '저출생'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정책과 법률은 '저출산'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낮은 저출생 문제에 대응해 발표하는 정부의 대책명도 '저출산 대책'이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국회에는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꾸는 법안이 발의돼 있고 일부 지자체가 조례에서 '저출생'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불과 1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저출산이라는 '독사'(견해)를 뒤흔드는 파라독사의 행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사유가 달라지고 다르게 보인다. 말에는 일종의 자기 최면효과가 있다. 스스로를 규정하고 한계 짓는 말을 하면 그 말의 덫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난 연약해, 난 별 볼 일 없어, 난 을이야, 내 직업은 하찮아' 등의 말부터 내던질 일이다. 또한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언어가 관계를 아프게 하고 균열을 낸다. 습관적이고 통용되는 언어라고 할지라도 그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다. 남을 판단하는 말, 무시하는 말, 정죄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더 나아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 중요하다. 새로운 언어, 엉뚱한 말, 낯선 말을 사용하며 그것을 쏘아올리면 그것이 새로운 의미의 파장을 일으킨다. 이런 작은 것이 관계를 새롭게 하고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내가 던지는 말이 곧 나이다. 그 사회에 통용되는 언어가 곧 그 사회의 수준이다. 우리에겐 파라-독사의 사유가 필요하다. 이는 기존의 통념이나 상식을 파괴하고 마구 거꾸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통념·상식을 상대화하고 다양한 견해들이 공존하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파라-독사의 실천도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들이 자아내는 파장으로 상생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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